09. 나에게로 오는 길, 여행

<여행의 이유>

by 더굿북

1.jpg?type=w1200 ⓒ이경선 스페인


그때 오래전부터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지 막연히 생각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향해 길을 나섰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선교를 위해 걸었던 길이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킬로미터의 길을 도보로 가는 순례길이다.


나를 내려놓으며

주비리와 팜플로냐를 거쳐 용서의 언덕(페르돈 언덕ALTO DEL PERDON)을 올랐다. 산등성이에는 당나귀, 개, 지친 순례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찬 바람을 견디며 서 있었다. 길게 이어진 경사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며 나는 용서에 대해 생각했다.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고달팠던 지난 시간과 7남매의 막내 며느리지만 번번이 시부모 부양의 책임을 떠맡으며 받은 상처가 먼저 떠올랐다. 나는 원망을 가졌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을 용서합니다” 소리 내어 말했다. 살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도 모두 이름을 부르며 용서한다고 말했다. 내가 용서를 구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3.jpg?type=w1200 ⓒ이경선 스페인


다음 차례는 나였다. 그 누구보다도 사실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했다.

“수고했다, 경선아! 열심히 잘 살았어. 이제부터는 네가 해야 하는 일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 소리 내어 나 자신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두 볼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길을 걸은 지 열흘이 지나자 10킬로그램을 넘던 배낭의 무게가 7킬로그램으로 줄었다. 배낭의 무게와 함께 내 삶의 무게도 확 줄었다. 나를 무겁게 하던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고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에 말리고 내 삶에서 덜어냈다.


동행

카미노에서의 동행은 본인의 고통은 스스로 감당하면서 서로의 길에 깊이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상대의 호흡과 보폭을 허용하며 같이 또 따로 걷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카미노딸이라고 부르는 지혜를 만난 것도 그랬다. 팜플로냐를 지나 푸엔테 라 레이나를 향해 가던 길목의 어느 카페에서 한국인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지나는 길에서 나를 봤었다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날로 우리는 동행이 되어 한참을 같이 걸었다.

레온에서 같은 숙소에 묵고 길을 나서던 어느 아침 지혜의 발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그날 25킬로미터 앞쪽에 있는 지역을 목표로 걷고 있었다. 몇 번 뒤처지기를 반복하던 지혜는 나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나는 기다려 같이 갈까 했으나 지혜가 부담된다고 사양했다. 지혜를 그곳에 두고 걸어오는데 눈물이 났다. 딸 같은 아이를 떼놓고 혼자 길을 걸었다. 더 기다려줘야 했던 건 아닐까 망설였으나 나에게는 나의 카미노가 있고 지혜에게는 지혜의 카미노가있다. ‘신이 그녀에게 필요한 시련과 교훈을 주시기를.’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따로 걸은 지 닷새 후 옛 수도원 건물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빨래를 널던 나에게 한 한국인 순례자가 지혜가 와서 나를 찾는다고 했다.

한달음에 달려간 숙소에 지혜가 와 있었다. 둘은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간의 이야기를 물으니 첫날은 간신히 5킬로미터쯤을 걸어 제일 가까운 알베르게에서 묵고 발이 회복된 후로는 하루에 40킬로미터를 걷고 사람들에게 물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꼭 한 번만 어머니를 더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리움

독일에서 온 얀은 내 또래의 여자다. 함께 걸으며 얀은 집에 두고 온 남편 이야기를 했다. 함께 오기로 했다가 사소한 다툼으로 혼자 순례길을 걷게 되었는데 남편이 몹시 그립다고 했다. 돌아가면 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좀 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했다. 나도 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남편 곁에서 눈뜨던 평범한 아침이 이렇게 눈물 나게 그리울 줄 전에는 몰랐다.

4.jpg?type=w1200 ⓒ이경선 스페인


순례일정의 마지막 일주일을 앞둔 어느 날,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카미노 표지석 위에서 예의 그 사진을 다시 보았다. 마침 그곳에서 쉬고 있던 나는 사진의 뒤쪽으로 돌아가봤다. 사진 뒷면에 편지가 있었다.

“This is my mother, BETTY GEAN KHUH,
She always wanted to travel
but never was able because of her health.
I am walking the camino with you, mom. BUEN CAMINO,
Miss, Love you and Rest in peace.”

카미노를 다녀와서 나의 생활은 많이 바뀌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과 나를 비움으로 넉넉해지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전보다 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을 걸어 나는 온전한 모습으로 나에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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