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상대의 속마음을 간파하라.

<제갈량처럼 앞서가라>

by 더굿북

황초 2년인 221년, 신하들이 존호(尊號)를 칭할 것을 권했으나 유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말했다.

“옛날 후한이 건국할 당시 오한과 경엄 등이 세조인 광무제에게 즉위할 것을 권하자 광무제가 앞뒤로 모두 4번 사양합니다. 경순이 진언하기를, ‘천하 영웅이 매우 우러르며 흠모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 사람의 건의를 따르지 않으면 사대부들은 각자 근거지로 돌아가 주인을 찾아 나서며 주공을 좇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광무제는 경순의 말에 심오한 이치가 있다고 느껴 마침내 승낙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한나라를 찬탈해 천하에 주인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왕은 황실인 유씨의 혈통으로서 그 대를 잇기 위해 일어난 까닭에 지금 제위에 오르는 게 마땅합니다. 사대부들이 대왕을 따라 오랫동안 고생한 것 또한 경순의 말처럼 조금이라도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비가 이에 제위에 오르게 됐다.
_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파트너 유비의 속마음을 대신하며 황제로 등극시킨 제갈량의 명분
- 적군 조직의 수장 조조가 한나라를 찬탈하여 주인이 없어짐
- 아군 조직의 신하들에게 새 왕조 수립으로 공훈을 보상해야 함


유비가 제위에 오른 것은 조비가 마침내 한나라를 대신한 위나라 황제의 자리에 오른 데 따른 것이었다. 조조를 한나라 왕실의 적으로 몬 유비로서는 논리상 보위에 오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뜻 보위에 오르지 않은 것은 겸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모든 왕조의 창업주는 이런 모습을 보였다. 조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비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손권 역시 이런 모습을 보였다.

조비가 한헌제로부터 왕위를 받은 시점은 위나라 황초 원년인 220년 10월 13일이다. 당시 한헌제는 한고조 유방의 사당에 나아가 제사를 올린 후 행(行)어사대부 장음(張音)에게 부절을 든 채 새수(璽綬)와 조서를 기록한 책인 소책(紹冊)을 받들어 위왕 조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선양의 취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조비가 내심 기뻐하며 해당 관원에게 한헌제 명의의 선양 조서를 읽게 했다. 조비가 왕랑을 시켜 자신은 박덕하니 달리 어진 사람을 구해 대위를 잇게 하라는 표문을 지어 올리게 했다. 한헌제가 조비의 표문을 보고 매우 의아하여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위왕이 사퇴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화흠이 건의했다.
“전에 위무왕 조조가 왕작(王爵)을 받을 때도 3번 사양한 후 받았습니다. 폐하가 다시 조서를 내리면 좇을 것입니다.”
다시 선양의 조서를 쓰게 한 뒤 다시 장음에게 부절을 주어 옥새를 받들고 위왕의 궁으로 가게 했다. 가후가 위왕 조비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장음에게 새수를 도로 가져가라고 명한 뒤 화흠에게 일러 천자로 하여금 대를 쌓게 하고 이름을 수선대(受禪臺)라 붙이게 하십시오. 이어 길일을 택해 대소 관원들을 모두 수선대 아래 모이게 한 뒤 천자로 하여금 친히 새수를 받들어 천하를 전하께 물려드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 사람의 의혹도 풀리고 뭇 사람들의 공론도 그칠 것입니다.”

조비가 이를 좇았다. 황초 원년인 220년 10월 29일, 한헌제가 위왕 조비에게 수선대 위로 오를 것을 청한 뒤 보위를 받게 했다. 친히 옥새를 받들어 건네자 조비는 이를 받았다. 한헌제의 시종이 선양의 조서를 다 읽자 조비가 곧 새수를 받고 보위에 앉았다. 이에 대소 관원들이 수선대 아래서 ‘만세’를 외치는 이른바 산호(山呼)를 하며 경하했다. 조비가 불을 피워 천지를 비롯해 산과 강하인 악독(嶽瀆)에 제사를 올렸다. 이어 국명을 대위(大魏)로 짓고, 연호를 연강에서 황초(黃初)로 바꾼 뒤 천하에 대사령을 포고했다.

조비는 보위에 오른 지 이틀 뒤 한헌제를 산양공에 봉했다. 산양공에게 한나라의 정삭(正朔)을 쓰고 천자의 예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뒤 산양공의 네 아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이어 위무왕 조조를 무제로 추존하고, 묘호를 태조라고 했다. 재상의 명칭도 바꿨다. 상국(相國)을 사도(司徒),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사공(司空)으로 고쳐 임명했다. 산양공의 두 딸을 빈으로 삼았다.

당시 익주에 있던 한중왕(漢中王) 유비는 조비가 낙양에 궁전을 세운 뒤 한헌제를 시해했다는 내용의 잘못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를 사실로 알고 곧바로 대소 관원들에게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을 것을 명한 뒤 한헌제에게 효민황제(孝愍皇帝)의 시호를 올렸다. 그는 크게 우울해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게 되자 모든 정무를 제갈량에게 맡겼다. 제갈량은 태부 허정(許靖)과 태자가령(太子家令) 초주(譙周) 등과 함께 유비를 황제로 옹립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초주가 유비를 찾아가 말했다.

“근자에 상서로운 바람과 경사스런 구름이 이는 등 길조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속히 황제의 자리에 올라 한나라의 대를 이을 조짐입니다.”
제갈량은 초주의 발언이 있고 난 뒤 허정과 함께 대소 관원들을 이끌고 들어가 표문을 올려 유비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청했다. 유비가 즉위를 거부했다. 이때 제갈량이 즉위하지 않으면 사대부들이 각자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가 새 주인을 찾아 나서며 유비를 좇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겁을 주며 속히 즉위할 것을 촉구했다.

유비가 마침내 허락했다. 황초 2년(221) 4월 6일, 제갈량이 백관들을 시켜 난가(鑾駕)로 유비를 모셔오게 했다. 유비가 단에 올라 천지에 제사를 지낸 후 제갈량이 올리는 새수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단 아래의 백관들이 만세를 부르자 곧바로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장무(章武)로 바꿨다. 이어 제갈량을 승상, 허정을 사도에 임명한 뒤 대소 관료들도 일일이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렸다. 이로써 유비는 조비가 위나라 황제로 등극한 지 꼭 4달 뒤에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했다.

후세 사가들은 유비의 한나라를 이전의 후한과 구분하기 위해 이를 촉한(蜀漢)으로 불렀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저 대한(大漢)으로 불렸을 뿐이다. 진수와 사마광은 『삼국지』와 『자치통감』을 저술하면서 유비를 선주(先主) 내지 한주(漢主) 또는 촉주(蜀主)로 불렀다. 유비는 촉한의 황제로 즉위한 후 왕비 오씨(吳氏)를 황후, 장남 유선을 태자, 차남 유영을 노왕(魯王), 3남 유리를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또 유선을 위해 거기장군 장비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

사마광은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한헌제가 위문제 조비에게 선양한 만큼 정통성이 위나라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치통감』이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이유다. 진수의 『삼국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는 이와 정반대로 보았다. 조씨의 위나라는 강압적으로 한나라를 찬탈한 까닭에 정통으로 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주희가 『자치통감』의 요약본인 『통감절목』을 저술하면서 촉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후한의 정통성이 유비로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사마광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말할 것도 없이 제갈량은 주희의 입장에서 유비의 즉위를 촉구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갈량이 ‘사대부들이 대왕을 따라 오랫동안 근고(勤苦)한 것은 척촌지공(尺寸之功)이라도 얻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이는 자그마한 공이라도 이뤄 벼슬과 명예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호명지심(好名之心)을 통찰한 결과다. ‘호명지심’은 이익을 향해 무한 질주하는 호리지성(好利之性) 못지않게 강렬하다. 특히 난세의 경우 더욱 그렇다.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는 이를 통찰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한비자』 「궤사」의 해당 대목이다.

“지금 세인들은 군주의 자리를 업신여기며 권력을 우습게 여기는 자를 두고 고상하다고 말하고, 군주를 낮춰보며 벼슬을 마다하는 자를 현명하다고 말하고, 이익을 무시하며 위세를 가벼이 여기는 자를 진중하다고 말하고, 법령을 따르지 않고 하고 싶은 바대로 행하는 자를 충실하다고 말하고, 명예를 숭상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는 자를 정절이 뛰어난 열사라고 말하고, 법을 가벼이 여기고 형벌이나 사형의 중벌도 피하지 않는 자를 용사라고 말한다. 지금 백성들이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상황이 이럴진대 선비 가운데 먹을 것이 없어 극도의 빈궁에 빠진 자가 어찌 도인을 흉내 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수행하는 방식으로 명성을 다투려 들지 않겠는가? 세상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신하들로 인한 게 아니라 군주가 다스리는 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룬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에 관한 이야기다.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인 앨버트 공이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다. 화가 난 남편 앨버트 공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여왕이지만 아내였던 빅토리아는 미안한 마음에 남편의 방문을 노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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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

빅토리아 여왕은 또다시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십니까”
“영국 여왕 빅토리아입니다.”
“......”

대답은커녕 방문도 열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화가 난 빅토리아 여왕은 집무실로 돌아가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남편의 방으로 가서 노크했다.

“누구십니까”
“당신의 아내입니다.”
그러자 방문이 열렸다.

이렇듯 마주하는 상대의 속마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큰 사업을 함께 만들어 가는 파트너의 속마음을 아는 것은 그 사업의 성패를 가를 수도 있다. 제갈량은 조직의 수장인 유비의 속마음도 알아주고 조직의 부하들의 속마음도 잘 챙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지혜의 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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