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차이에서 출발한다
사물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공부를 통해 알게 된 ‘차이’나 ‘다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차이가 생기거나 다름을 인식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런 상황이 생기면 대부분 사람은 거부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차이가 불편함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적응한 환경이나 지식에 변화를 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다. 그다음에는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존과 안녕에 미칠 영향을 판단해보기 위함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생존과 안녕에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무시하고 만다. 반면, 영향을 크게 미치는 일이라고 판단한 사람 일부는 저항하며 거부하고, 나머지는 기존의 것을 대체하거나 융합하는 방법으로 차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차이’가 생기면 무시하는 사람, 저항하며 거부하는 사람,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데 무시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차이’, 즉 ‘다르다’는 것을 ‘틀리다’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두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라고 하면 잘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머릿속으로는 ‘다르다’를 ‘틀리다’로 받아들인다. 일단 ‘틀리다’로 해석하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만들어진다. 두 단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다르다 [형용사]
1. 비교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
2. 보통의 것보다 두드러진 데가 있다.
틀리다 [동사]
1.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
2. 바라거나 하려는 일이 순조롭게 되지 못하다.
정치인들을 보면 ‘다르다’를 쉽게 ‘틀리다’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은 곧 틀린 생각이라는 식이다. 그러니 틀린 상대의 생각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이들이 너무 똑똑해서 공부할 게 없어서 생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아니라면 지금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그걸 지켜내기 위해 차이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내재한 심각한 문제이고, 이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판단을 하는 뇌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뇌는 앞서 설명한 대로 두 가지 욕구로 갈등한다. 하나는 만족하고 변화하지 않으려는 욕구고, 다른 하나는 더 나은 대안을 찾아 발전하기 위해 변화하려는 욕구다. 예를 들어, 배가 부르고 따뜻하면 만사가 귀찮고 심지어 몸을 움직이는 작은 변화조차도 거부하려 한다. 하지만 머릿속 한쪽에서는 곧 닥쳐올 추위와 배고픔에 대비해 일하고자 한다. 전자는 변화를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육체적 발상이고, 후자는 변화를 예측하고 대응하려는 뇌의 이성적 발상이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가?
신경학자들은 우리 뇌가 혈액 속에 흐르는 산소나 포도당과 같은 아주 적은 연료를 사용해 작동하는 엄청난 효율을 지닌 기관이라고 한다. 뇌는 초당 300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하고 뇌의 신경계는 280억 개나 되는 뉴런을 가지고 있으며, 각 뉴런은 100만 비트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다. 이 슈퍼컴퓨터로 모든 것이 귀찮아서 움직이는 것조차 거부하는 판단을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차이나 변화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의 다른 특징 한 가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무엇'을 자세히 알게 된다는 것은 그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상태가 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거부할 일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거부’나 ‘무시’는 자세히 안 다음에 해야 정상이다. 앞뒤가 바뀌어서는 바른 판단이 불가능하다. 물론 모든 ‘차이’나 ‘변화’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모두 흡수해야 옳다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 관심을 둘 만한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것이 우선이고 그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그런데 변화나 차이를 스펀지처럼 잘 흡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파인먼(Richard Feynman)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핵 개발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사람이다. 한번은 그가 소립자에 관해 아주 급진적인 견해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신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내가 머리털이 난 이후로 그런 웃기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세 가지 타입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물론 변화나 차이를 잘 흡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변화나 차이를 잘 감지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뭐가 달라졌는지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세세한 차이를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이를 알아내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있다면 묻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로 잡식동물이라는 점을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잡식동물로는 개미, 쥐, 개 등이 있는데, 무엇보다 잡식동물은 머리가 좋다. 왜냐하면, 잡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잡식하려면 항상 새로운 먹잇감이 자신에게 독이 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새로운 먹잇감을 이해하지 않고 달려들었다가는 독버섯과 같은 먹잇감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먹잇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현명하고도 용감해야 한다. 현명하고 용감한 행동의 대가는 엄청나다. 먹잇감을 따라 이동하거나, 주된 먹잇감이 사라지는 위험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잡식하지 않는 새나 꿀벌이 먹잇감이 줄어듦에 따라 같이 개체 수가 줄어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로운 먹잇감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생명을 연장하는 놀라운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잡식동물에는 이 문제가 오로지 먹잇감에만 한정되지만, 인간에게는 둘러싼 모든 사회 환경이 먹잇감과 같은 구조로 연결된다. 새로운 지식도, 새로운 변화도 인간에게는 새로운 먹잇감과 같다. 과거의 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새로움은 도전이자 먹잇감이다. 그러니 차이나 변화가 생기는 것을 명확하게 감지해야 하고, 위험하더라도 맛봐야 하고, 내게 유익하다면 먹어서 내 몸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어제와 다른 우리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차이를 직접 만들면 어떤가? 마르셀 뒤샹이나 아인슈타인이 아니더라도 작은 차이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 않은가?
# [해설 연재 안내] 출판사로 보내주신 독자의 요청과 질문, 댓글의 궁금증, 책에 담지 못한 일부 내용 등을 모아 <천재들의 공부법(11~20편)>에 담아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