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처럼 대담하라>
조조가 말했다.
“먼저 아군의 조직을 잘 다지고 무기와 장비를 완벽하게 준비해 둔 뒤 적이 느슨해지며 허점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군이 승리를 점칠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승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싸움은 늘 상대방이 있기 마련이니 적도 아군의 움직임에 따라 미리 대비하기 때문이다. 기회가 올 때까지 아군의 실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완벽하게 준비했을 때 적이 공격해 오면 그 자리에서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다. 아군이 수비에 치중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은 적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군이 적극 공세를 취하는 것은 힘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_ 『손자약해』 「군형」
맡겨진 일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신중히 수행하라.
조조는 원소와 함께 ‘반(反) 동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홀로 싸움에 뛰어들었다가 패한 후 철저히 기다리며 힘을 기르는 ‘도광양회’의 길을 걸었다. 『손자약해』 「군형」의 주석에서 “아군이 적극 공세를 취하는 것은 힘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라며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유여계’를 제시한 근본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삼국연의』는 조조를 가볍게 처신하는(輕佻浮薄) 인물로 묘사해 놓았다. 동탁을 섣불리 척살하려 드는 무모한 인물로 그린 것은 물론 무고한 여백사를 죽인 뒤 ‘천하 사람을 버릴지언정’ 운운한 것으로 묘사한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조조가 이렇게 경박한 행동을 일삼으며 ‘천하 사람을 버릴지언정’ 운운했다면 이내 원술의 전철을 밟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종오는 위와 같은 사례를 근거로 『후흑학』에서 조조를 심흑(心黑)의 달인으로 간주했다. 이는 전장에서 현란한 책략을 구사하는 조조가 득인과 용인의 계책에도 그대로 썼을 것으로 지레짐작한 데 따른 것이다. 실제로 『삼국연의』는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
대표적인 예가 군량 책임관 왕후의 목을 벤 일화이다. 이에 따르면 원술을 토벌할 당시 조조는 17만 대군의 양식을 댈 길이 없게 되자, 죄 없는 군량 책임관 왕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원술의 군사를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마침 양식이 부족하게 되자 군량 책임관 왕후가 조조에게 이같이 보고했다.
“군사는 많고 양식은 적으니 어찌합니까?”
조조가 말했다.
“작은 되로 나눠주어 우선 굶주림이나 면하게 하시오.”
왕후가 다시 물었다.
“병사들이 불만을 품으면 어떻게 합니까?”
조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나에게 생각이 있소.”
왕후는 조조의 속셈도 모르고 조조에게서 들은 바대로 시행했다. 조조가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각 영채에 가서 살피게 했더니 모두 조조가 자신들을 속인다며 크게 원망했다. 조조가 은밀히 왕후를 불러들였다.
“내가 당신한테 물건 하나를 빌려서 그것으로 군심을 진정시켜 보려고 하는데 당신은 부디 아까워하지 마시오.”
왕후가 물었다.
“어떤 물건을 쓰려는 것입니까?”
조조가 말했다.
“군사들에 보여주기 위해 당신의 머리를 빌리고 싶소.”
왕후가 소스라치게 놀라 말했다.
“저는 실로 아무 죄도 없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나도 당신한테 죄가 없는 것을 알지만,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필시 변이 일어나고 말 터이니 어쩔 수가 없소. 당신이 죽은 뒤에 처자는 내가 잘 돌봐 줄 것이오.”
그러고는 곧바로 그의 목을 치게 했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를 장대에 높이 매달아 놓고 이런 내용의 방을 붙였다. ‘왕후가 함부로 작은 되를 써서 양곡을 도둑질하였기로 군법에 따라 처단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조조는 이종오가 말한 대로 통상적인 득인술과 용인술에서 심흑을 거리낌 없이 구사한 셈이 된다. 그야말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중인격의 표본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일이 있었을까? 조조는 기본적으로 이런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원래 이 대목의 출처는 「무제기」 배송지주에 인용된 『조만전』이다. 『조만전』에 나오는 내용은 『삼국연의』 내용과도 사뭇 다르다. 『조만전』에는 군량미 담당관이라고만 되어 있지 왕후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가공의 인물이다. 『조만전』조차 작은 되로 군량미를 나누어 주자고 제안한 사람은 조조가 아니라 군량미 담당관으로 되어 있다. 당시에 이런 식으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심흑을 구사했다가는 이내 궤멸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조조는 관직에 나선 이후 매우 근엄하면서도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20세 때 효렴에 추천되어 낭관이 된 뒤 곧바로 낙양의 북부위에 제수되었을 때의 일화를 들 수 있다. 위(尉)는 군사나 형옥의 일을 담당하는 관원을 총칭하는 말이다. 태위가 군사를 담당하고 정위가 형옥을 맡고, 위위가 궁문의 수비 등을 담당한 것이 그 증거다. 이 밖에도 중위와 도위, 교위 등이 있었다. 지방의 경우는 군 단위의 군위와 현 단위의 현위가 따로 있어 각기 해당 지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관은 모두 고위직에서 하위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위’로 통칭했다.
전한 때의 장안과 후한 때의 낙양의 경우는 동서남북으로 4명의 위를 두었다. 조조는 북쪽을 담당하는 북부위가 됐다. 조조를 추천한 사람은 상서우승으로 경조윤(京兆尹)을 겸직하고 있던 사마방이었다. 그는 이종오가 당대 최고의 면후와 심흑을 구사한 인물로 지목한 사마의의 부친이다.
조조는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강력하고 엄격한 법 집행을 했다.
당시 낙양 북부위는 낮은 직책에 불과했으나 조조는 이 직책을 매우 신중히 수행했다. 애초 그는 부임하자마자 사대문부터 정비했다. 5가지 색깔의 몽둥이 10여 개를 만들어 고을의 사대문에 걸어두고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벌을 주었다. 하루는 영제가 총애하는 건석의 숙부가 통금을 어기고 밤중에 다니는 것을 잡아 죽였다. 이후 경내의 모든 사람이 밤길을 자제한 것은 물론 감히 이를 범하려는 자가 없게 됐다.
그러나 조조는 건석 등 환관의 미움을 받아 모두 두 번에 걸쳐 낙향하게 된다. 조조가 고향인 초현으로 돌아간 이후의 상황과 관련해 배송지주에 인용된 『위서』는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성 밖에 집을 짓고 봄과 여름에는 독서를 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수렵하며 이를 낙으로 삼았다.”
당시 조조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는 훗날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志令」에서 당시를 이같이 회상한 바 있다. “관직을 내놓은 뒤에도 내 나이는 아직 어렸다. 효렴에 천거된 동료들을 돌아보니 나이가 50세에 이르렀는데도 이름을 세우지도 못한 채 늙은 자도 있었다. 이에 내심 도모키를, 오히려 20년쯤 세상과 떨어져 천하가 맑아질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나가 같은 나이에 효렴에 천거된 자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초현의 동쪽 50리에 정자를 짓고는 여름과 가을로 독서하고 겨울과 봄으로 사냥하면서, 지하 토굴을 만든 뒤 흙벽을 쌓고 빈객과 내왕하고자 하는 마음을 끊고자 했다. 그러나 부득이 그같이 하지 못했다.”
조조는 세상과 권력에 아부하며 도를 어기고 얼굴을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시 정황에 비춰 그의 귀향은 하나의 뛰어난 전략이었다. 당시 조조는 혼미한 시국을 이유로 부득이 20년 후에 관직에 다시 나갈 생각을 했으나 이는 그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세월이 조조를 마냥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는 이 기간에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시대의 부름을 기다릴 수 있었다.
대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필패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조조는 젊었을 때 귀향을 선택함으로써 자중자애를 실현했다. 당시 조조가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화를 초래할 소지가 컸다. 조조는 현명하게도 낙향의 시간을 혼미한 정국상황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며 심신을 단련하는 호기로 삼았다.
중평 3년인 186년 조조는 도위(都尉)에 임명돼 다시 상경하게 됐다. 세 번째로 관직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조조가 10여 년 동안 보여준 활약을 통해 그의 식견과 담략 등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조조가 비록 병을 칭하며 귀향해 은거하고 있었으나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속뜻을 알고 있었다.
조조가 도위에 임명돼 병권을 쥐게 되자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조조의 나이가 34세가 되는 중평 5년인 188년, 기주자사 왕분과 남양 출신 허유 등이 조조를 찾아와 영제를 폐하고 합비후(合肥侯)를 세우는 일을 상의했다. 조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배송지주에 인용된 『위서』와 사마표의 『구주춘추(九州春秋)』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전 태부 진번의 아들 진일이 기주자사 왕분을 만나는 자리에서 술사로 활약한 평원 사람 양해와 마주치게 됐다. 양해가 앞날을 예언해 말하기를, ‘천문이 환관에게 불리하니 황문과 상시가 틀림없이 멸족할 것이오.’라고 했다. 진일이 기뻐하자 왕분이 나서서 말하기를,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 또한 그들을 제거하는 일에 나서고 싶소.’라고 했다. 이에 진일과 왕분은 곧 호걸들과 서로 교신을 해 세력을 규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영제가 하간의 옛집에 머물며 북쪽을 순행하려고 하자 왕분 등이 이 틈을 타 난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에 우선 상주문을 올려 흑산적이 인근 군현을 약탈하니 이를 소탕하기 위해 거병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마침 북방의 한밤중에 붉은 기운이 있어 동서를 가로질러 하늘을 관통하자 천문을 관측하는 태사가 영제에게 상언하기를, ‘북방에 불순한 조짐이 있으니 북쪽으로 순행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영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영제는 왕분이 불순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조명을 내려 낙양으로 불렀다. 왕분은 자신의 계책이 누설된 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인수를 풀고 도주했다가 평원에 이르러 자살하고 말았다.”
왕분 등은 나름의 담략이 있기는 했으나 대세를 정확히 읽지 못한 데다가 거사를 너무 서둘렀다. 조조가 이들이 실패할 것을 예견하고 가담을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시국 및 대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배송지주에 나오는 『위서』의 다음 기록은 조조가 얼마나 자중자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릇 천자를 폐립하는 것은 천하에 가장 상서롭지 못한 일이오. 황제 폐립의 성패와 경중을 치밀하게 저울질해 시행한 사람으로는 오직 이윤과 곽광이 있을 뿐이오. 지금 제군들은 옛날 이윤과 곽광의 거사가 쉽게 이뤄진 것만 보고, 지금의 어려움을 보지 못하고 있소. 제군들은 사람들을 모아 무리를 이룰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나 어떻게 전한 초기 오초7국의 난에 가담한 제후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소. 합비후가 귀한 신분이라 한들 어찌 오초7국의 난 주동자인 오왕과 초왕보다 더할 수 있겠소. 비상한 거사를 하게 되면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데 이번 일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소.”
황제의 폐립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주변 여건이 정확히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조조는 왕분 등의 능력이 이윤 및 곽광에 미칠 수 없다는 점을 통찰하고 있었다. 천하대세를 읽는 조조의 뛰어난 식견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시 조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왕분은 이내 평원 사람 화흠과 도구홍 등을 끌어들여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려 했다. 화흠은 도구홍이 왕분에게 부화뇌동해 거사하려 하자 이같이 만류했다.
“폐립의 대사는 이윤과 곽광도 어려웠소. 왕분은 성정이 조악하고 군사를 모르기 때문에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소.”
국가경영이든 기업경영이든 인간이 하는 사업은 우주 만물이 생장소멸의 과정을 거치듯이 구상과 기획, 실행, 결실, 새로운 구상 등 생장소멸의 순환과정을 반복한다. 왕조의 흥망성쇠가 연이어지는 이유다. 기업의 명멸도 이와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웅지를 품었을지라도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치밀한 구상과 계획이 필요하다.
산모가 아이를 출산할 때 최소한 10달의 회임 기간이 필요한 것과 같다. 옥동자를 낳기 위해서는 산모가 오랜 시간을 바치듯이 좋은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순신 장군이 말하였다.
“좋은 지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며 근무했다. 또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에야 마흔일곱의 나이로 좌수사의 지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