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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2. 2016

06. 결정적인 때를 대비하라.

<제갈량처럼 앞서가라>

건흥 3년,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남정에 올라 그해 가을 모두 평정했다. 군사 물자가 여기서 나온 까닭에 나라가 부유하고 풍요로워졌다. 이내 군사를 정비하고 무예를 강습하며 크게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_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여유로울 때 유사시를 준비하라.

유비를 뒤를 이은 유선은 건흥 원년인 223년에 제갈량을 무향후에 봉하고, 승상부를 열어 정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얼마 후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크고 작은 정무사안 모두 제갈량을 거쳐 결정했다. 이 와중에 지금의 운남성과 귀주성 및 사천성 남부에 해당하는 남중 지역의 여러 군이 일거에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막 유비의 장례를 치르는 국상을 만난 까닭에 곧바로 군사를 동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사시를 대비해 오나라에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었다.
     
당시 제갈량이 취한 이런 행보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해당했다. 실제로 그는 건흥 3년인 225년에 군사를 이끌고 남정에 올라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촉한의 군사 물자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주목할 것은 당시 제갈량이 나라가 부유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군사를 정비하고 무예를 강습했던 점이다. 쉼 없이 실력을 닦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린 셈이다.
     
애초 유비는 이릉대전의 패배로 인해 영안궁에 머물며 회복을 꾀했으나 병세가 더욱 악화하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사자를 시켜 성도에 있는 제갈량과 상서령 이엄 등을 불렀다. 제갈량이 태자 유선에게 성도를 지키게 하고 유비의 작은 아들 노왕 유영 및 양왕 유리와 함께 영안궁으로 유비를 보러 갔다.
     
당시 한가태수 황원은 제갈량이 꺼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비가 병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1개 군을 들어 반기를 든 뒤 임공성을 불태웠다. 제갈량은 동쪽으로 가 유비를 간병하고 있었기에 성도의 방비가 매우 허술해 사실상 거의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원은 더욱 거리낄 게 없었다. 익주치중종사 양홍이 태자 유선에게 건의해 장군 진물과 정작을 보내 황원을 토벌케 했다. 사람들은 황원이 만일 성도를 포위하지 못하면 사천성 서창현 동남쪽의 월수를 떠나 남중을 점거할 것으로 생각했다. 양홍은 유선에게 건의했다.
     
“황원은 평소 성질이 흉포한 데다 신의가 없는데 어찌 능히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단지 배를 타고 흘러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곧 결박돼 처형될 것입니다. 설령 그리 안 될지라도 그는 겨우 오나라로 도망가 목숨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진물과 정작에게 명하여 남안의 협구를 막도록 하면 능히 그를 잡을 수 있습니다.”
   
     

제갈량, 실질적인 촉한의 통치자가 되다.

과연 황원이 싸움에 패하여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진물과 정작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성도가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제갈량은 영안궁에 이르러 유비의 병이 위중함을 보고 조석으로 시약(侍藥)하며 유비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제갈량의 이런 헌신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병은 더욱 깊어져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마침내 유비가 임종 직전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황망히 용탑 아래 엎드렸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용탑 곁으로 올라와 앉을 것을 권한 뒤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짐이 승상을 얻어 다행히도 제 업을 이루었으나 워낙 아는 것이 없어 승상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낭패를 볼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그 일을 몹시 후회하다가 병이 들어 목숨이 조석에 있소. 사자(嗣子)가 잔약(孱弱)해 부득불 대사를 부탁하기 위해 승상을 부른 것이오.”
   
유비가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제갈량 역시 눈물을 흘리며 속히 쾌유할 것을 빌었다. 그러나 유비는 자신이 죽을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모든 신하를 전각 안으로 불러들이게 한 뒤 종이와 붓을 가져다 유조(遺詔)를 쓰게 해 제갈량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이같이 탄식했다.
     
“성인이 이르기를 ‘새가 장차 죽으려 하니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하니 그 말이 착하다.’고 했소. 짐이 본디 경들과 함께 조적(曹賊)을 멸하고 또한 함께 한실을 붙들어 세우려 했으나 불행히 중도에 헤어지게 되었소. 승상은 부디 유조를 태자 유선에게 전해주시오. 이를 예사말로 여기지 말고 모든 일을 승상이 가르쳐주기 바라오.”
   
     

제갈량을 믿었던 유비, 유비와 촉한에 충성한 제갈량

제갈량이 엎드려 울며 말했다.
“바라건대, 폐하는 용체를 편히 하십시오. 신 등이 견마의 수고를 다 해 폐하의 지우지은(知遇之恩)에 보답하겠습니다.”
유비가 내시에게 분부해 제갈량을 붙들어 일으키게 한 후 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또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짐은 이제 죽거니와 짐의 심중에 있는 말을 한마디 하려고 하오.”
제갈량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비가 대답했다.
“승상의 재주가 조비보다 10배나 나으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대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짐의 아들이 도울 만하거든 돕고 만일 그럴 만한 자질이 못되거든 승상이 스스로 성도의 주인이 되시오.”
이 말을 듣자 제갈량이 온몸에 진땀을 흘렸다. 손과 발을 떨면서 말했다.
“신이 어찌 감히 고굉의 노력과 충절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죽어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머리를 땅에 부딪쳐 피를 흘렸다. 유비는 다시 제갈량을 청해 침상 위에 앉게 하고는 노왕 유영과 양왕 유리에게 앞으로 나오라 한 뒤 분부했다.
“너희들은 모두 짐의 말을 명심해라. 짐이 세상을 떠난 뒤 너희들 모두 승상을 부친으로 섬기고 태만하지 말라.”
분부를 마친 유비는 두 아들에게 명하여 제갈량에게 절을 시켰다.
그러자 제갈량이 울먹이며 말했다.
“신이 비록 목숨을 바친다 한들 어찌 이 지우지은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모든 신하를 보고 당부했다.
“짐은 이미 승상에게 자식들을 부탁하고 사자로 하여금 그를 아비로 섬기게 하였소. 경들은 조금이라도 태만하여 짐의 소망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제갈량과 사마의의 ‘탁고유명’은 다르다.

그 유명한 탁고유명(託孤遺命) 대목이다. 삼국시대에 나타난 또 하나의 유명한 ‘탁고유명’ 대목을 들라면 위나라 명제 조예가 어린 조방(曹芳)을 사마의에게 맡긴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유비의 탁고유명과 조예의 탁고유명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제갈량은 어린 유선을 끝까지 돌보며 충성으로 나라를 지킨(竭忠報國) 데 반해, 사마의는 어린 조방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는(弑君簒位) 길을 열었다. 유비와 제갈량 사이에 이뤄진 탁고유명이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 배경이다.
     
제갈량은 동오를 견제하기 위해 곧바로 이엄을 중도호(中都護)로 삼아 영안에 남아 진수케 했다. 제갈량이 모든 관원과 함께 돌아오자 태자 유선이 성 밖으로 나와 영구를 맞아들여 정전 안에 안치하고 유조를 받아 읽었다.
     
“사람이 50세에 죽으면 요절이라 하지 않는데 나는 이미 60여 세니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단지 너의 형제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악이 작다고 행하지 말고 선이 작다고 버리지 말라. 현명한 덕만이 비로소 사람을 신복시킬 수 있다. 네 아비는 덕이 박하여 네가 배울 만한 것이 없다. 태자는 승상과 같이 일을 처리하면서 승상을 부모 모시듯이 섬겨야 한다.”
   
     

유비가 죽자 남중의 세력들은 독립을 외쳤다.

유비가 죽고 유선이 촉한의 제위를 이어받자 남중의 세력들은 공개적으로 촉한에 반대하며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옹개는 오나라로부터 영창태수에 임명된 후 영창으로 진격하자는 기치를 내걸었고, 고정은 촉한의 월수태수 초황을 살해한 뒤 왕으로 칭하면서 반기를 들었다. 주포는 근거지인 장가군을 중심으로 이들에게 호응하고 나섰다. 오직 영창군의 공조 여개와 부승 왕항만이 옹개에 항거하며 촉한에 동조했다.
     
따라서 군주는 어리고 백성들은 나라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친 촉한으로서는 남중의 평정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과제이기도 했다. 남중을 잃게 되면 곧 파군(巴郡)이 위험해진다. 이는 익주까지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촉한이 이 반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한나라의 부흥은커녕 위나라 및 오나라와 삼국정립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문제는 대규모 군사를 출동시킬 경우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데 남중은 길이 멀고 험해 원정이 쉽지 않은 데 있었다. 설령 일시 점거했다 할지라도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알 수 없었다. 정벌의 시일이 길어지면 오나라가 형주에서 곧바로 서진하거나, 위나라가 한중을 탈취한 후 남하할 게 뻔했다. 장가군과 월수군 등의 남부지역이 옹개 등의 반군세력에 점거될 경우 촉한은 내부분란으로 인해 북벌에 나서기도 전에 스스로 붕괴하는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다. 더구나 제갈량은 마침 국상 중이었다. 그가 군사를 즉각 일으키지 못하고 때를 기다리며 신중히 대처한 이유다. 
     
그는 익주로 들어오는 관문을 틀어막은 뒤 백성들이 휴식을 취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양식이 풍족하게 될 때를 기다려 용병하고자 했다. 마침내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제갈량이 입조해 유선에게 건의했다.
     
“남만이 불복하는 것을 보니 실로 나라에 큰 우환거리입니다. 직접 대군을 이끌고 가 정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비 유선이 물었다.
“동에는 손권이 있고 북에는 조비가 있는데 지금 승상이 짐을 버리고 나갔다가 만일 오와 위가 와서 치기라도 하면 어찌하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동오는 우리와 갓 강화한 터이니 다른 생각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다른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육손을 감당할 만한 이엄이 백제성에 있습니다. 조비는 패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기가 이미 꺾였으니 아직 먼 데를 도모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마초가 한중의 여러 관소를 지키고 있으니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신은 먼저 가서 만방(蠻方)을 소탕한 연후 북벌하여 중원을 도모해 선제의 삼고 지은(三顧之恩)과 탁고유명(託孤遺命)에 삼가 보답하고자 합니다.”
간의대부 왕련(王連)이 제갈량의 남정을 만류했다.
“남방으로 말하면 불모의 땅이고 무더운 습기에 따른 풍토병인 장역(瘴疫)이 심한데 승상이 나라의 중심을 잡는 균형(鈞衡)의 중임을 맡은 몸으로 친히 원정함은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또한, 옹개 등은 하찮은 것들이니 대장 한 사람을 보내 치더라도 능히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반박했다.
“만방은 촉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덕화(德化)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소. 그들을 수습해 복종시키기는 매우 어려우니 내가 직접 가서 치지 않을 수 없고 또 형편을 보아 강유(剛柔)를 분별해야 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일이 못 되오.”
   
왕련이 재삼 간했으나 제갈량이 끝내 듣지 않았다. 원래 제갈량의 남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산되고 기획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한 ‘융중대’의 골자 중에 서쪽으로 융족(戎族)과 화합하고 남쪽으론 이월(夷越)을 진무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게 바로 그 증거다.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 『삼국연의』는 제갈량이 무려 군사 50만 명을 동원했다고 기록했으나 이는 허구이다. 그 경우 익주의 인구 가운데 절반가량이 출전하는 셈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략 3~5만 명가량 동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세 길로 나누어 반적들을 동시에 토벌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제갈량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곧바로 옹개와 고정의 목을 베었다. 출병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남중을 모두 평정하고 회군했다. 「제갈량전」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무예를 강습하는 치융강무(治戎讲武)로 군사를 크게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고 언급한 것은 바로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한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군사적 정벌의 결정적인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 대표적인 사례다.

청각 장애를 비롯해 온갖 난관을 뚫고 위대한 음악을 만든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위대한 인간의 단 한 가지 공통점은 고된 환경에 처해있더라도 끈기로 무장해 참고 견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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