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평전>
사임당이 조선 사회를 살아간 시대(1504~1551)는 그야말로 네 번의 사화가 일어난 기간(1498~1545)과 거의 일치한다. 이와 같은 시대를 몸소 지켜보고 겪으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감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내내 사화의 소용돌이를 직간접으로 몸소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신명화 또한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던 시대에 벼슬에 나아가 사화의 희생양이 되기보다 학문을 하며 초야에 묻혀 살았던 것만 보아도 그 시기는 누구에게나 감내하기 어려운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어려웠던 시대를 사임당이 누구보다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유교적 예법의 굴레에 얽매여 여성은 자기를 내세우지 못하고 그 자리가 점점 좁아져만 가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사임당이 그 시대의 질곡을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사임당의 타고난 능력도 있었겠지만 바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현명한 교육과 외가의 영향이 크다.
16세기는 여성이 혼인하여 친정살이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임당은 조금 더 특별했다. 사임당의 외할머니 최씨도,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도, 그리고 사임당까지 3대가 오죽헌에서 친정살이했기 때문이다. 사임당은 이와 같은 성장 배경 아래, 학문이 깊은 외조부 이사온(李思溫)과 아버지의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깊은 성리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고,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는 올바른 부덕의 행함과 현모의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출가한 뒤에도 부모와 함께 오랜 기간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媤家)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은 적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식을 일곱 명이나 낳고도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친가 생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의 저자 이은상도 “외조부 이사온의 학문과 어머니 이씨의 덕행, 아버지 신명화의 엄격한 훈계 밑에서 여자의 갖추어야 할 근본 교양과 자품을 길러 장차 현부인이 될 기초를 마련했던 것을 더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만큼 한 인간의 삶에 가정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임당은 조선 사회의 다른 여성과 비교해 본다면 남다른 혜택을 입은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사임당의 학문적 스승이었던 아버지 신명화(申命和, 1476~1522)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로 고려 태조 때의 건국 공신이던 장절공 신숭겸(壯絶公 申崇謙, ?~927)의 18대손이며, 영월군수 신숙권(申叔權)의 아들로 조선 성종 7년(1476년)에 태어났으며 자(字)는 계흠(季欽), 호는 송정(松亭)이다. 신명화는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천성이 순박하고 강직하여 선비로서의 기개(氣槪)와 지조(志操)가 남달리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현의 글을 읽되 선악(善惡)으로써 자신의 언행을 징계하는 자료로 삼았고, 자라면서는 학문에 더욱 힘써 높은 학문적 소양과 뛰어난 인품으로 동문수학한 동료들 사이에서도 지조 굳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예(禮)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고, 신의(信義)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 예로 장인과의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신명화의 장인이 어떤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인은 신명화를 불러 자신이 아파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쓰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신명화는 정색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말과 행동이 정직한 것은 가장 가치 있는 높은 덕이라고 봅니다.” 하여 그 청을 거절하였다.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명화는 말과 행동이 정직한, 가장 가치 있고 높은 덕(德)을 실현한 이라 할 수 있다.
신명화는 효성도 지극하였다 전한다. 그는 연산군 시절 아버지 상(喪)을 당하게 되는데, 단상(短喪)하라는 연산군의 폭정에도 굴하지 않고 고스란히 삼년상(三年喪)을 모시면서 그 슬픔을 극진히 다하였다고 한다. 당시 연산군은 스스로 인수대비(소혜왕후)의 단상을 시행하는 등 삼년상을 금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언제 어떠한 일로 피바람이 몰아칠지 모르는 어지러운 폭정의 시대에 중앙 정계에 있는 정치가들조차도 그 위세에 눌려 삼년상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을 때 홀로 삼년상을 치렀다 함은 신명화가 효성은 물론이고 지조 또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명화의 이러한 효심은 신사임당 효(孝) 사상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신명화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을 연구하는 데만 전념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사임당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강직하고 올곧은 아버지 슬하에서 사임당은 일찍부터 엄격한 훈계 아래 학문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고, 이런 아버지로부터의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출가 전에 학문과 예술이 상당한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명화는 그렇게 아끼던 둘째 딸 사임당을 이원수에게 출가시킨 몇 달 후인 1522년 11월 7일 향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신명화는 생전에 공정하고 엄격한 성품을 가졌던 것으로 전하며, 그 공정함과 엄격함이 둘째 딸 신사임당에게 그대로 이어져 전하였다. 어찌 신사임당에게만 전해졌을까. 그의 외손자 율곡에게 끼친 영향도 매우 컸음을 율곡 이이가 남긴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율곡 이이는 『율곡전서(栗谷全書)』 「외조고진사신공명화행장(外祖考進士申公命和行狀)」에 외할아버지 신명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진사 신 공의 휘는 명화, 자는 계흠(季欽)이다. 천성이 순박하고 지조가 굳세어 어려서 글을 읽을 때부터 벌써 선악(善惡)으로써 자기의 권계(勸戒)로 삼았다. 장성하자 학행이 독실하였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연산조 때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는데, 이때 단상(短喪)하라는 법령이 엄했지만, 진사는 끝까지 예를 폐하지 않고 상복에 수질, 요질로 여묘살이를 하며 죽을 마시고 몹시 야위어 가면서 몸소 밥을 지어 상식을 드리고 3년 동안 슬픔을 극진히 다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론이 장하게 여겼다.”
예(禮)를 다른 그 무엇보다 중시한 조선 사회에서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던 외할아버지의 강직함을 생각하며 생전에 뵙지 못한 아쉬움을 율곡은 글로 전하고 있다.
다음으로 어머니 용인 이씨의 가르침에 대해 기록으로 전하는 것을 살펴보자. 가정교육만으로 일관했던 조선 시대의 여성 교육을 볼 때 가정 내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그 누구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오늘날 어머니상으로 추앙을 받게 된 데에는 그녀의 어머니 용인 이씨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의 본관은 경기도 용인으로, 시조는 길권(吉卷)이며 증조부는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지낸 유약(有若)이며, 조부는 전라도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지낸 익달(益達)이며, 아버지는 생원으로 벼슬을 하지 않은 사온(思溫)이다. 이사온이 강릉 참판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의 딸 최씨와 결혼하여 얻은 무남독녀가 바로 이씨 부인이다.
최응현은 강릉의 12향현으로 떠받들어졌으며 성균관사성,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등 중앙 정계 관직을 고루 거치며 학문과 경륜을 펼친 대학자였다. 최응현의 부친 최치운(崔致雲, 1390~1440) 또한 강릉의 12향현으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이조참판까지 올라 외교관, 무관, 학자로서 크게 문명을 떨친 강릉 최씨 문중의 걸출한 유학자이다.
이런 유학자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운 이씨 부인은 학문의 깊이뿐 아니라 부녀가 꼭 행하여야 할 네 가지 덕목, 즉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한다.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또 그 어머니에서 사임당으로, 그렇게 오죽헌의 진한 먹 향기는 3대째 이어져 내려왔다.
율곡 이이는 『율곡전서(栗谷全書)』 「이씨감천기」에서 외조모 이씨를 “말에는 서툴어도 행동에는 민첩했으며, 모든 것에 신중히 하되 착한 일에는 과단성이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여자의 말이 서툴다 함은 말을 할 줄 몰라 더듬거린다는 뜻이 아니라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며 부언(婦言)을 실천했다는 뜻이다. 과거에 우리나라는 말이 많은 사람을 경솔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본받을 만한 말을 가려 말하며, 예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으며, 거친 말을 하지 않으며, 때에 알맞은 뒤에야 말해서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게 하는 것이 부언의 실천이었다.
무남독녀였던 이씨 부인은 효행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친정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자 시어머니 홍 씨의 허락을 받고 친정으로 와서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이씨감천기」에는 외조모 이씨가 약을 미리 맛보고 밤에도 취침하지 않으면서 지극정성으로 모친을 돌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한양으로 가자고 한 남편 신명화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며 청했다 한다.
“여자란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으니 분부를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저의 부모는 이미 늙으셨고 저는 외동딸이오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제가 없게 되면 부모님은 누구를 의탁하시겠습니까. 더구나 훤당(萱堂)께서 오랜 병환으로 탕약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습니까. 제가 애통하여 눈물 흘리며 우는 것은 오직 이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드려 허락받고자 하는 것은 당신은 한양으로 가시고 저는 시골에 머물면서 각각 노친을 모시도록 하자는 것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였다. 진사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드디어 그 말을 따랐다.
용인 이씨의 이러한 물음에 남편 신명화가 그 말과 정성에 감동하여 그대로 따랐을 정도로 신명화와 용인 이씨 모두 효의 중요성을 진심으로 알고 실천했던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신명화와 이씨 부인은 16년간이나 떨어져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느라 비록 몸은 떨어져 살았지만 이씨 부인의 남편에 대한 정성은 아무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지극했다 한다.
율곡이 지은 「이씨감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씨 부인이 42세 되던 해 친정어머니 최씨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에 있던 신명화가 장모의 상(喪)을 보러 강릉으로 오는 길에 큰 병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이 위중하여 7일 밤낮을 간병했으나 호전이 되지 않자, 이씨 부인은 남편의 병을 낫게 하고자 외증조부 최치운의 무덤 앞에 나아가 작은 칼을 꺼내 왼손 중지 두 마디를 자르면서 “저의 정성이 지극하지 못해서 이렇게까지 되었사옵니다. 몸뚱이나 머리터럭가지라도 모두 다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감히 훼상하지 못한다 하옵지마는 내 하늘은 남편인데 하늘로 삼는 이가 무너진다면 어찌 홀로 산다 하오리까. 바라건대, 제 몸으로써 남편의 목숨을 대신하고 싶사오니 하늘이시어, 하늘이시어! 저의 이 정성을 굽어살피옵소서.”라며 절규했다고 전한다.
단지(斷指)까지 한 그 정성에 하늘이 감복해서일까. 단지 후 사임당은 아버지가 이제 일어나실 거라는 선몽을 꾸었고, 곧 신명화는 병을 털고 일어났다. 이러한 덕행은 후에 조정에까지 알려져 이씨 부인이 49세였던 중종 23년(1528년)에 열녀 정각이 세워졌다. 중종 21년(1526년) 7월, 강원도 관찰사였던 황효헌이 이 씨의 단지(斷指)를 열녀의 한 사례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중종실록』에 전하고 있다.
사임당 부덕(婦德)의 근본은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자라고, 또 그 자신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성장해 온 덕분이 아닐까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율곡이다. 어머니 사임당이 율곡의 나이 열여섯 살에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며 격려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외조모 용인 이씨였기 때문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에도 외조모 이씨를 칭송한 글이 전한다.
“이씨는 나의 외조모이시다. 부자의 사이와 부부의 관계에 있어 행동할 때 인예(仁禮)로 하기에 힘썼으니, 참으로 이른바 부도(婦道)를 훌륭하게 실천하신 분으로서, 마땅히 규문(閨門)의 규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부의 정이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16여 년이나 떨어져 사시었고, 진사께서 질병이 나셨을 적에는 마침내 지성으로 빌어 하늘의 뜻을 감동하게 했으니, 빼어난 사람의 행실과 옛사람을 초월하는 절의(節義)가 아니고서야 어찌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군자(士君子)의 대열에 끼어 군부(君父)의 사이에 처하게 하였더라면 충효(忠孝)를 다 갖추고 국가를 바로잡았을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충효를 다 갖추고 국가를 바로잡았을 것’이라는 율곡의 대단한 칭송에서 이씨 부인의 덕행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또한 외조모를 향한 율곡의 존경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어머니와 자식처럼 그 정이 남달리 깊었던 외조모 이씨가 돌아가셨을 때 율곡은 사임당이 돌아가셨을 때의 커다란 아픔을 다시금 느끼며 그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율곡의 심정은 이씨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쓴 ‘제사 드리는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는데 어루만져 주시고 안아 주시며 잠시도 잊지 않고 보살펴 주시니, 그 은혜 산하(山河)보다 무겁습니다. 후사(後事)를 부탁하시어 저를 착한 아이로 보셨으니, 외조모와 외손자는 그 명칭뿐이오, 정분은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였습니다. (…) 도중에서 부음을 만나게 되니 오장이 열이 나서 끊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저의 태어남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부모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슬픔을 안았습니다. 오직 조모님 한 분만이 자나 깨나 가슴 속에 계셨는데, 이제 또 저를 버리시니 하늘은 어찌 그리 혹독하십니까. (…) 이승은 끝이 났으니 영원히 침통할 것입니다. 공손히 약간의 제수를 차려서 궤연(几筵)에 올리옵니다. 아!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