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평전>
사임당은 조선 연산군 10년(1504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음력 10월 29일 새벽에 태어났다. 아버지 신명화(申命和, 1476~1522)와 어머니 용인 이씨(龍仁 李氏, 1480~1569) 사이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가 바로 사임당이다.
사임당이 태어난 강원도 강릉 땅은 옛날 예국(蘂國)의 수도였던 이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빛나는 문화와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서쪽에는 태백준령의 대관령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동쪽에는 푸른 동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산수 자연이 그림 같이 아름답고 인심이 순후하여 일찍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치가 나라 안에서 실상 제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강릉은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문향(文鄕)의 고장이었다고 전한다.
특히 이중환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하는 조건으로 “첫째, 지리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 그 땅에서 생산되는 이익)가 좋아야 하며, 다음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강릉 땅이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강릉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시 한 수 읊었을 선인들의 풍류가 느껴지는 이곳에서 사임당은 태어났다. 이런 문향의 고장에 천혜의 자연환경까지 갖춘 오죽헌은, 사임당의 가슴 가득 자연을 품도록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어린 시절 사임당이 뛰어놀았을 경포호의 아름다움까지 더해서 사임당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이렇듯 사임당과 하나가 된 자연은 후에 사임당에 의해 종이와 비단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연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사임당의 고향 강릉이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을 사임당에게 선물로 주었다면, 사임당이 태어난 해인 1504년은 사임당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아픔을 준 해였다. 바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이어 또 한 번의 피바람이 몰아친 해이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지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라 성리학의 근간에 따라 어느 정도 국가의 틀은 완성된 후였지만, 『주자가례』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나 민가에서는 남귀여가혼과 자녀 균분상속, 외손봉사 등 고려의 오랜 풍습이 더디게 변화하고 있는 때였다.
정치적으로 연산군에서 선조에 이르는 이 시기는 권문세가들의 사화와 당파싸움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실로 격동의 세월 한가운데였다. 조선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훈구 공신들은 새로운 세도가로 급부상하였고 그들에 대한 특혜가 또 다른 사회 병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병폐는 훈구파의 권력과 경제력 확장에 반대, 이상 정치인 도학(道學)을 주장하며 등장한 사림파의 갈등으로 이어져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화(士禍)가 발생하게 되었다.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알려진 대로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사초 중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올림으로써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 학자들이 참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의제(義帝)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제문으로, 단종을 항우에게 죽임당한 의제에 비유하여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훈구세력이 연산군을 꾀어 김일손 등 사림파를 숙청하고,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윤씨의 폐비를 문제 삼아 당시의 두 숙의(淑儀) 엄씨와 조씨를 타살하고, 할머니인 인수대비도 구타,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한 사화다. 또한, 어머니 윤씨를 성종의 묘소에 함께 모시려 하였는데, 권달수(權達手, 1469~1504)와 이행(李荇, 1478~1534)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을 보냈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고자 할 때 이에 찬성한 윤필상(尹弼商, 1427~1504), 권주(權柱, 1457~1505),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이주(李冑, 1468~1504)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고인이 된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정창손(鄭昌孫, 1402~1487), 정여창(鄭汝昌, 1450~1504),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등의 이름난 신하와 존경받는 유학자들을 모조리 부관참시한 엄청난 피의 역사를 자행한 사건이다.
연산군의 이러한 악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각 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馬)을 구해 바치게 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성리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들을 연이어 자행한다. 왕과 학자들 간의 의사소통 경로인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쓴소리를 극도로 싫어한 나머지 사간원(司諫院)까지 폐지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연산군은 1506년(중종 1년)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박원종(朴元宗, 1467~1510)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조차 쫓겨나는 치욕을 당하게 되고, 강화도 교동으로 강제 유배되어 간 후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는다.
그러나 중종반정 역시 방탕한 생활로 국고를 탕진한 연산군이 바닥난 국고를 메우기 위해 훈구파들의 토지를 빼앗으려 하자 일으킨 반정으로, 나라나 백성을 위한 결단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일으킨 반정이었다. 이에 중종은 훈구파들의 등쌀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업고 왕권 강화를 시도하려 했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이가 바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다. 조광조는 유교적 도학 정치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 방법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결국 훈구파의 반격을 두려워한 중종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이른바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기묘사화로 그동안 조정에 진출해 있던 많은 사림이 또 화를 당하게 되고, 결국 사림파 개혁의 분위기는 한층 주춤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명종 즉위년(1545년)에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1487~1545) 세력의 대윤(大尹)과 윤원형(尹元衡, ?~1565) 세력인 소윤(小尹)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발생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소윤이 대윤을 숙청하면서 다시 한 번 사림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