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조언>
1656년 7월 27일, 네덜란드의 한 청년이 저주의 판결을 받았다.
그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도 저주받고 일어날 때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인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그의 죄에 노여워하실 것이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덮쳐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구약성서》 〈신명기〉 28장의 저주와 〈열왕기 하〉 2장의 엘리사의 저주를 연상시키는 저주였다. 신을 배신한 인간에게 내린다는 신의 형벌이었다. 신은 그의 이름조차 지워버릴 것이라고 했다. 즉 그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다.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도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누구나 입으로 그와 말을 주고받지 말라. 글로써 그와 의사를 주고받지도 말라. 아무도 그를 돌보지 말라. 아무도 그와 한 지붕 밑에서 살지 말라. 아무도 그의 4에르렌(2m) 근처에 가지 말라. 누구도 그가 구술했거나 직접 쓴 문서를 읽지 말라.”
아무도 그와 말해서는 안 된다. 그와 함께 사는 것은 물론 그의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고 했다. 이 엄청난 저주와 사회적 형벌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왜 그런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했을까? 저주를 받은 청년의 이름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스피노자는 유대교회의 종교의식에 따라 파문되었다.
스피노자는 두려웠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열혈 유대교 청년의 습격을 받았다.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스피노자는 고립되었다. 형제들도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아버지의 가업을 함께 운영했던 동생은 형을 내쫓았다. 여동생은 오빠가 상속받을 재산을 가로채려 했다. 친구들도 스피노자의 곁을 떠나갔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단 한 걸음도 내디딜 곳이 없었다. 결국,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 근처 작은 마을의 외딴집 다락방으로 피신했다. 이후 스피노자는 그 주인과 평생을 함께 살았다.
다락방으로 피신한 후 스피노자의 삶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광학 렌즈를 깎으면서 근근이 생활했다. 회계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당장 생활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재정적으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또한, 스피노자는 수입보다 지출이 적지 않도록 했다. 돈이 남아서 저축해봐야 재산을 물려줄 자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활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으로 모두 책을 샀다.
스피노자는 집 밖으로 나오는 일도 드물었다. 어떤 때는 자신의 다락방에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다락방에서 스피노자는 홀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파문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며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파문 이후의 삶은 어두운 밤과 같았다. 무엇보다 스피노자를 괴롭힌 것은 고독이었다. 고독만큼 무서운 것이 있을까? 스피노자는 가족과 친구 등 모든 지인으로부터 고립되었다. 고립은 더욱 처절한 고독을 낳았다. 도대체 25세의 청년은 왜 이토록 가혹한 저주와 형벌을 받은 것일까?
신이 신체를 가졌다면
스피노자가 살던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유로웠다. 네덜란드에는 왕도 귀족도 없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절대군주제였던 반면 네덜란드는 총독과 국회가 권력을 나누어 통치하는 공화제적 국가였다. 30여 년에 걸친 독립 전쟁의 결과였다.
네덜란드는 스피노자가 열여섯 살이 되던 1648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네덜란드의 귀족층은 독립 전쟁 중에 대부분 전사했다. 그 대신 시민계급이 주도적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네덜란드의 시민계급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시민계급은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보다 경제적 이익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다.
유럽 각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탄압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정치적인 이유로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5년간 살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종교적인 이유로 망명하여 20년을 살았다.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왔다. 그래서 네덜란드에는 가톨릭교인, 신교도인, 유대교인 등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 스피노자의 아버지 역시 종교적 탄압을 피해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대교인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자유가 신을 부정할 자유까지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표방했지만, 여전히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였다.
스피노자가 파문을 당한 것은 신을 부정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파문을 당하기 얼마 전, 유대교회 장로들이 스피노자를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자네는 친구들에게 신은 신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나?” 스피노자가 그 질문에 무엇이라 답변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들의 질문으로 보면 스피노자가 교회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신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은 신이 영원불멸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신이 신체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란 스피노자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스피노자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교회의 장로들은 스피노자가 유대교 신앙의 빛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피노자 역시 장로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공부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의문이 커졌다.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라틴어를 배웠다. 라틴어는 당시 유럽의 공통 문어였다. 대부분 학자가 라틴어로 글을 썼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한문으로 글을 쓴 것처럼 말이다. 스피노자 역시 자신의 주저인 《에티카(Ethica)》를 라틴어로 썼다. 유럽 내에서 광범위하게 읽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라틴어를 배우자 학문의 세계가 달라졌다. 스피노자는 고대와 중세 학자들이 남긴 유산을 마음껏 섭렵할 수 있게 되었다. 학문이 넓어지면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졌다.
교회의 장로들은 스피노자를 회유하고자 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겠다고 서약하면 거액의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장로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편안한 생활을 맞바꾸지 않았고, 그 결과 평생을 짓누르는 파문을 당하게 되었다.
철학은 고통 없는 쾌락이다.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 20세기 철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은 “사회적 혼란기에 창조적 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개인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창조의 역량이 발휘되는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고난의 삶을 창조로 승화했다. 그래서 그는 후대에 삶과 철학의 양 측면에서 존경받고 있다. 스피노자는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철학을 하자고 했다. 31세 무렵에 쓴 《지성개선론(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에서 철학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험이 나에게 사회생활 가운데 보통 생기는 모든 일이 헛되고 무용함을 깨닫게 한 뒤에 - 내가 두려워했던 모든 일이, 그것이 내 마음에 감동을 일으킨다는 뜻으로밖에는,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뒤에 - 나는 마침내 다음 문제를 탐구하기로 했다. 즉 정말 값지고 그 가치를 나에게 나누어줄 수 있으며, 오직 그것만이(다른 온갖 것들이 배척된 뒤에)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획득함으로써 내가 계속적이요, 완전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될 그런 무엇이 정말 있을 것인가를.”
자신이 당한 고통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라 했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해줄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명예와 부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달리다 실패하면 어찌할 것인가? 스피노자는 “희망이 좌절될 때 우리는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철학을 하자고 힘주어 강조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 즉 철학만은 실패에 따른 고통이 생길 염려가 없는 쾌락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힘써 공부했다. 《지성개선론》에 이어 쓴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Renati des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는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심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그 책에서 자신이 무엇을 탐구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데카르트는 스피노자보다 한 세대 앞의 사람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데카르트는 종교적인 이유로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1628년부터 1648년까지 20년간 살았다. 가장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에 네덜란드에 거주하면서 주요 저서를 집필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철학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데카르트는 이미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스웨덴의 여왕이 가정교사로 초빙할 정도였다. 네덜란드에도 데카르트의 제자를 자처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스피노자와 알고 지내던 학자 중 상당수가 데카르트 학도였다. 스피노자도 데카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다. 무엇이 불만이었을까?
풀 한 포기도 신이다.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의 원제목은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다. ‘에티카’는 윤리학을 뜻하는 라틴어다.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이란 말이 이채롭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정의-공리-정리-증명’의 순서로 자신의 주장을 서술했다. 여기에서 ‘정의-공리-정리-증명’의 순서가 바로 기하학에서 어떤 명제를 증명하는 ‘기하학적 순서’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순서로 자신의 주장을 서술한 데에서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기하학적 논증 방법을 제시했다. 즉 데카르트는 아무리 복잡한 것일지라도 부분으로 나누어,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사실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데카르트의 주장 자체를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특히 ‘실체’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다. 데카르트는 신과 정신, 그리고 물질이 모두 실체라고 했다. 신은 자연 혹은 우주, 즉 이 세상 바깥에 존재하므로 초월적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완벽하다’는 말을 이용한다. 완벽하다는 말이 있는 이유는 ‘완벽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완벽한 것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완벽한 것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즉 완벽한 것은 이 세상 바깥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완벽한 존재가 바로 신이다.
신과 달리 정신과 물질은 이 세상 안에 존재한다. 그중 정신의 본질은 사유, 즉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은 신으로부터 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인 ‘이성’을 받았다. 그러면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질에는 색깔, 맛, 향기 등이 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물질마다 색깔, 맛, 향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은 길이, 면적, 부피다. 데카르트는 길이, 면적, 부피를 통칭하여 연장(延長)이라 했다. 따라서 물질의 본질은 바로 연장이다.
정신에 내재한 이성은 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바깥에 존재하는 신을 이성으로 알 수 없다.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뿐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불만을 품었다. 데카르트처럼 주장한다면 철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철학은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신, 정신, 물질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행복의 길을 찾는 학문이어야 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성으로 신, 정신, 물질을 한꺼번에 설명하고자 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실체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며 자기 자신만에 의해 사유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공리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존재한다.”고 했다. 뒤이은 정리에서 “자연에는 똑같은 본성 또는 속성을 갖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을 증명하면서 “자연에는 실체와 그것의 변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변체’란 ‘실체가 다양하게 자신을 드러낸 모습’을 의미한다.
자연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체가 아닌 것들은 무엇인가? 실체가 자신을 다양하게 드러낸 변체일 뿐이다. 이렇게 실체에 관해 설명한 후,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생각될 수도 없다. (…)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료하게 도출된다. 첫째, 신은 유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에는 다만 하나만의 실체가 존재할 뿐이며, 더욱이 그것은 절대 무한하다. (…) 둘째, 연장과 사유는 신의 속성이거나 신의 속성의 변체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다고 했다. 데카르트가 물질의 본질이라고 한 연장, 그리고 정신의 본질이라고 한 사유는 신의 속성 혹은 신의 변체일 뿐이다. 정신과 물질에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길가에 자라는 풀 한 포기를 보라. 그것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하찮은 식물이 아니다. 그것 역시 신이 자신의 모습을 풀로 드러낸 것이다. 이렇듯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 다양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신은 곧 자연”이라고 했다.
데카르트는 신과 정신, 그리고 물질이 모두 실체라고 했다. 여기에서 신은 우리가 사는 자연을 초월한 존재이고, 따라서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이성을 통해 물질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의 영역은 탐구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 믿음의 영역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영역을 별도로 존중하여 놔두고, 정신과 물질을 나누어 물질만 이성을 통해 파악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스피노자는 우리가 사는 자연에서 신만이 오직 실체라고 했다. 정신과 물질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신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은 우리가 사는 자연 안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신의 속성을 알 수 있다.
행복은 고귀하고 드물다.
스피노자는 신만이 자연에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라면서 “신은 곧 자연”이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을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가 유대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일을 상기해 보자. 그때 장로들은 스피노자에게 “신은 신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나?”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전해지지 않지만, 스피노자의 주장에서 답변을 추론할 수 있다. 신은 신체를 가진 존재다. 왜냐하면, 신체는 신이 자신을 드러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신은 전혀 다르다.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신은 창조주이지만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교회에서 주장하는 신은 초월적인 존재다. 신은 신체를 갖지 않는다. 신이 신체를 갖는다면 그것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스피노자가 교회에서 파문을 당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스피노자는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신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유신론(有神論, Theism)의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교회의 측면에서 볼 때 스피노자는 신의 초월성을 부정한 무신론자일 뿐이었다. 더욱이 스피노자는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유일신(唯一神)을 부정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정신이 곧 신이고 물질이 곧 신이다. 자연에는 신만이 유일한 실체라 했으니 신은 하나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 또한 신이므로 신은 여럿이다. 이렇듯 신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그래서 유일신 사상은 부정된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사상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교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신 및 자연에 대하여 후대의 기독교도들이 믿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왜 스피노자는 초월적 신을 부정하게 되었을까? 초월적 신은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측면에서 볼 때 행복은 초월적 신이 창조한 질서를 따르고 신의 계시를 받들어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외부적 상황이 아무리 어지러울지라도 신이 창조한 질서가 회복될 것을 믿고 신이 제시한 규범을 따르고자 하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신에게 봉사함으로써 신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생각은 달랐다. 초월적 신은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다. 인간은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신이 내리는 징벌을 피하고자 신에게 봉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상을 받는다 해도 살아있는 동안에 받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받게 될 뿐이다. 따라서 신을 초월적 존재로 인식하는 한, 인간은 살아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스피노자에게도 신은 행복의 원천이다. 신이 행복의 원천이려면 초월적 존재여서는 안 된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므로 최고 행복의 구현체다. 따라서 신을 알 수 있어야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이 초월적 존재여서 신에 대해 알 수 없다면 행복에 이르는 길 역시 발견하기 어렵다.
스피노자가 행복하려면 철학을 하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피노자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한 사색 끝에 ‘신이 곧 자연’임을 발견했다. 신이 곧 자연이므로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것, 즉 세상 만물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을 관찰하고 사색을 통해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신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찰과 사색을 통해, 즉 철학을 하여 깨달은 이치에 맞게 살아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치를 깨닫고 삶을 그 이치와 일치시키는 사람이 ‘현자(賢者)’라고 했다.
“우리는 현자의 능력이 얼마나 크며, 그리고 그는 쾌락에 의해서만 충동하는 무지한 사람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안다. 즉 무지한 사람은 외적 원인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동되어 결코 정신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과 사물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채로 생활하며, 그리고 영향받는 일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그친다. 반대로 현자는 그가 현자로 여겨지는 한, 마음속에 동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신과 사물의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서 의식하며 결코 존재를 멈추지 않고 언제나 마음의 진정한 만족을 누린다.”
현자는 신과 사물에 대해 알기 때문에 진정한 만족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신과 사물에 대해 아는 것이 쉬운 일인가? 스피노자 역시 그 어려움을 인정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행복이 손 가까이 있어 대단한 노력 없이도 발견될 수 있다면 어떻게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서 등한시될 수 있었을까? 분명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어렵다.”
행복은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온 천지에 널려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 길가의 돌처럼 널려 있는 것이라면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노력 없이 행복을 얻을 수 없다. 행복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는 삶은 인간적 삶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신이 곧 자연’임을 밝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파문을 당하여 박해받고 소외된 삶에서 행복을 찾는 길을 몸소 보여주었다. 스피노자가 말한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주변의 일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유심히 관찰하는 것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항상 노력하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