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Sep 19. 2016

07. 경청하고 또 경청하라.

<제갈량처럼 앞서가라>

간언을 받아들이는 납언(納言)에 관한 정사(政事)는 간하고 다투는 간쟁(諫諍)을 널리 허용함으로써 아랫사람의 계책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것을 말한다. 군주에게는 직언하는 쟁신, 아비에게는 직언하는 쟁자가 있어야 한다. 군주와 아비가 의롭지 못할 때 과감히 직언을 올리도록 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을 따르고 악을 바로잡을 수 있다.

_ 『편의 16책』 「납언」
   
     
조직을 위한 좋은 의견이나 제안은 기본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확실히 달라진다. 실제로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직후 군신들을 모아놓고 법제 정비 방안 등을 전하며 이같이 당부한 바 있다.
     
“무릇 위정자는 중인들의 지혜를 모으고 널리 유익한 의견을 들어야 하오. 혹여 작은 틈이라도 생겨 상호 소원해짐으로써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없게 되면 국가에 큰 손실을 입히게 되오. 다른 의견을 듣지 않고도 사리에 맞게 된 경우는 마치 해진 미투리를 던져서 진주를 얻는 것과 같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이를 매우 고통스러워 하여 끝내 제대로 하지를 못하오. 오직 서서만이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소홀함이 없었소. 또한, 동화의 경우도 7년 동안 공무를 담당하면서 일이 이치에 닿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10번에 걸쳐 반문해 들은 후 나에게 보고했소. 서서의 10분의 1을 능히 배울 수 있고 동화의 근면한 자세를 닮을 수만 있다면 거의 실수가 없을 것이오.”
   
     

좋은 의견을 얼마나 수용하느냐가 좋은 리더가 되는 길이다.


이어 제갈량은 제신들에게 때를 가리지 않고 충언과 직언을 아끼지 말고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내용이 『편의 16책』 「납언」에 나오는 구절과 유사하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인자로 있었던 까닭에 주로 주군인 유비에게 간언을 올리는 처지에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일종의 왕사(王師)로 대우한 까닭에 제갈량의 건의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만 유비도 나름대로 자부심과 고집이 있는 까닭에 제갈량의 건의를 모두 수용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동오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인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게 그렇다. 이릉대전은 조조와 유비 및 손권을 중심으로 삼국이 정치(鼎峙)한 ‘건안(建安) 시대’의 실질적인 종언을 고한 전쟁에 해당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삼국 모두 밖으로 진출하기보다는 내부역량을 강화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동시에 전쟁의 성격도 대규모 전면전에서 소규모 국지전으로 뒤바꾸는 결정적인 전기로 작용했다. 상승세를 타고 있던 촉한의 힘이 동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좌절된 결과다.
     
이 싸움은 촉한의 황초 2년인 221년 7월부터 이듬해 윤유월까지 꼬박 1년간 계속된 매우 큰 전쟁이었다. 싸움의 발단은 손권이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죽인 데서 촉발됐다. 유비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 동오를 공격고자 했다. 관우의 원수도 갚고 형주를 탈환하고 하는 속셈이었다. 손권은 육손(陸遜)을 대도독으로 삼아 촉군을 저지하게 했다. 1년간에 걸친 두 나라 간의 접전이 이뤄진 근본배경이다. 애초 유비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동오의 손권을 치고자 했다. 관우의 죽음을 설욕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운이 간했다.
“국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위나라를 멸하면 손권은 자연스럽게 복종할 것입니다. 지금 조조가 비록 죽었다고 하나 그의 아들 조비가 제위를 도둑질했으니 응당 민심에 부응해 먼저 관중을 도모한 후 황하를 점거하여 위수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흉적을 쳐야 합니다. 관동의 의사(義士)는 반드시 양식을 싸 가지고 전마를 몰고 와 우리 군사를 맞이할 것입니다. 위나라를 놓아둔 채 먼저 동오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양쪽이 한 번 교전하게 되면 일거에 해결이 날 수 없으니 이는 결코 상책이 될 수 없습니다.”
   
장비의 죽음에 비통해한 관우와 유비 신하 중에는 조운처럼 간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모두 물리쳤다. 당시 장비는 관우의 죽음에 너무 비통해한 나머지 술에 취하면 더욱 노기가 뻗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매질을 가했다. 유비는 매일 교장(敎場)에 나가 군마를 조련하며 날짜를 정해 군사를 일으켜 원정을 떠나려고 했다. 이를 보고 여러 공경이 승상부중으로 가서 제갈량에게 이같이 말했다.
     
“이제 황상이 대위(大位)에 오른 지 얼마 안 되는데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려 하니 이는 사직을 중히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승상은 어찌하여 이를 간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제갈량이 대답했다.
“내가 여러 차례 간곡히 말씀드렸지만, 아직 윤허하지 않고 있소.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가서 말씀을 올려 보도록 합시다.”
제갈량이 이내 문무백관들을 이끌고 유비를 찾아가 이같이 간했다.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얼마 안 되니 만일 북으로 한나라의 역적을 쳐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는 것이면 친히 전군을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는 것도 괜찮습니다. 단지 동오만을 치려 하는 것이면 1명 상장에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가 듣지 않았다.
제갈량이 표문을 올렸다.
“신이 생각건대, 오적(吳賊)의 간사한 꾀가 형주에 복망(覆亡)의 화를 가져왔으니 이 애통함이야 실로 잊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한나라를 뒤엎은 죄는 조조에게 있지, 손권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위적(魏賊)만 없애고 나면 동오는 자연히 와서 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결코 동오를 치려는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장비가 장병들을 지나치게 엄히 다루다가 휘하 장수인 장달(張達)과 범강(范强)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를 두고 진수는 관우와 장비 등의 전기를 다룬 「촉서, 관장마황조전」에서 이같이 평해 놓았다.
     
“관우와 장비는 모두 1만 명의 적을 상대할 만하여 당대의 호신(虎臣)으로 불렸다. 관우는 조조에게 보답하였고 장비는 대의로써 엄안을 풀어주었으니 이들은 모두 국사(國士)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굳세고 교만한 강이자긍(剛而自矜), 장비는 포학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는 폭이무은(暴而無恩)의 모습을 보였다. 이들이 이런 단점으로 실패한 것은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비가 횡사하게 되자 장비의 휘하 장수 오반(吳班)이 즉시 표문을 써 유비에게 변을 고했다. 유비가 너무 애통해한 나머지 식음을 폐했다. 신하들이 나서 간하자 유비가 비로소 수저를 든 뒤 동오를 향해 진격했다. 소식을 접한 손권이 곧바로 조비에게 표문을 올려 칭신(稱臣)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다가 뒤를 돌아다봐야 하는 걱정인 이른바 후고지우(後顧之憂)를 덜었다. 손권이 전력을 다해 유비의 침공을 막을 수 있게 된 이유다.
     
당시 조비는 촉한이 동오를 침공해 두 나라가 서로 싸워 지치게 되면 일거에 대군을 일으켜 제압할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오를 침공한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그러나 이릉대전의 개막 당시 유비는 승승장구했다. 이에 손권이 이같이 탄식했다.
     
“주랑 뒤에는 노숙이 있었고 노숙 뒤에는 여몽이 있었건만 이제는 여몽이 죽으니 아무도 나와 근심을 나눌 사람이 없구나!”
이때 감택(闞澤)이 건의했다.
“주유와 노숙 및 여몽이 세상을 떠났다고는 하나 아직 육손이 있습니다. 그는 웅재대략(雄才大略)을 지닌 인물로 그 재주가 결코 주유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전에 관우를 깨뜨린 것도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손권은 곧바로 육손을 대도독 우호군 진서장군으로 삼은 뒤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그는 육손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곤내(閫內)의 일은 과인이 주재하겠으나 곤외(閫外)의 일은 장군이 제어토록 하시오.”
   
곤(閫)은 원래 왕후가 거처하는 곳을 의미한다. ‘곤내’는 제왕의 본령인 정치를 뜻하고 ‘곤외’는 군사를 말한다. 육손이 전 군사를 이끌고 그날로 출병했다. 이때 유비는 자귀에 당도해 수륙 양면으로 진격하여 곧바로 동오를 치려고 했다. 
     
치중종사 황권(黃權)이 간했다.
“오나라 사람들은 강하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나 우리 수군은 물을 따라 내려가기 때문에 전진하기는 쉬우나 퇴각이 어렵습니다. 신은 청컨대 선봉이 되어 진격하려고 하니 폐하는 뒤에서 따라와 주십시오.”
   
     

성급한 분노로 이릉대전에서 패배하다.


유비가 이내 군사를 둘로 나눠 황권으로 하여금 강북의 모든 군사를 통수하면서 위나라의 공세에 대비하게 했다. 이어 자신은 직접 제장들을 이끌고 형주 이도현(夷道縣)의 효정(猇亭)으로 진군했다. 유비가 효정을 점거하자 동오의 장수들은 기습을 가하고자 했으나 육손이 반대했다.
     
“유비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왔으니 예기(銳氣)가 극성할 때요. 게다가 고지에 올라가 험고(險固)에 기대고 있으니 단번에 공략하기도 어렵소. 설령 이긴다 해도 그들을 완전히 제압하기도 어렵소. 만일 싸움이 불리하게 되면 곧 우리의 주력이 상처를 입게 되니 이는 보통 작은 손실이 아니오. 지금은 단지 장병들을 격려하고 계략을 널리 사용해 전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해야만 하오. 만일 이곳이 평원이나 광야라면 우리는 이리저리 쫓겨 다닐 우려가 큽니다. 다행히 지금 그들은 산을 따라 진군하여 세력을 펼 곳이 없으니 이내 스스로 돌과 나무 사이에서 지치고 말 것이오. 이때 천천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는 오직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유비는 수비에 치중한 육손의 계책으로 인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동오의 경내로 깊숙이 진출했다. 일거에 동오를 공략할 심산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호북성 파동현 서쪽에 있는 무협(巫峽)을 빠져나온 뒤 무협으로부터 이릉까지 700여 리에 걸쳐 40여 채의 영채를 나란히 세운 이유다.
     
동오의 군사들은 반년이 다 가도록 유비의 도전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오에 급습을 가해 일거에 제압하려고 생각한 유비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예기도 크게 떨어진 데다 자칫 동오의 기습이 이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비가 명령을 내려 수림이 무성한 곳으로 영채를 옮기게 했다. 골짜기의 물을 끼고 여름을 보낸 뒤 가을이 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진병할 생각이었다. 
     
중군호위 부융(傅肜)이 유비에게 간했다.
“육손은 모략이 많습니다. 이번에 폐하께서 멀리 나와 봄부터 여름에 걸쳐 원정하고 있는데도 그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일 동오의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오면 어찌할 것입니까”
유비가 대답했다.
“짐이 오반에게 약병(弱兵) 1만여 명을 이끌고 가 동오의 영채에 가까운 평지에 주둔케 하고 따로 정병 8천 명을 선발해 산골짜기에 매복시켜 두기로 했소. 만약 짐이 영채를 옮기는 것을 육손이 알게 되면 필시 그 틈을 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칠 것이오. 그때 오반이 거짓 패하여 달아나게 하고 만약 육손이 그 뒤를 쫓아오거든 짐이 매복시켜 두었던 정병을 이끌고 갑자기 나가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어버릴 생각이오.”
   
그러나 육손은 유비의 속셈을 훤히 읽고 있었다. 이미 촉군을 일거에 깨뜨릴 계책을 마련한 뒤 때가 오자 총공격의 계책을 담은 표문을 올렸다. 손권이 곧 동오 군사들을 크게 일으켜 접응하러 나섰다. 육손이 마침내 총공격을 가하려고 하자 오나라 장수들이 불만을 표했다.
     
“유비를 공격하려고 했으면 당초에 해야 했습니다. 지금 이미 그가 7백 리에 걸쳐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어 상호 대치한 지 벌써 7~8개월이나 흘렀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 곳에 요새를 구축해 놓고 이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어 설령 공격하더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육손이 설득했다.
“유비는 매우 교활한 데다 일찍이 산전수전을 겪어 군사를 동원할 때 이미 나름대로 주밀하게 따졌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 주둔한 지 이미 오래되어 병사들이 지치고 의기가 떨어진 데다 우리 측의 장점을 알지도 못하고 있어 다른 계책을 세울 수도 없을 것이오. 적들을 협격해 뿔을 뽑아내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소.”
   
육손이 동남풍이 부는 날 제장들에게 하령 하여 촉병의 40개 영채를 하나씩 걸러 모두 20곳에 불을 놓도록 했다. 동오군은 일제히 촉군의 영채로 달려가 불을 지른 뒤 촉군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동오군의 급습에 놀란 유비가 황망히 말에 올라 마안산에 이르게 되자 앞뒤에서 몰려온 동오의 군사들이 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유비가 야음을 틈타 몰래 도주했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백제성으로 왔을 때는 겨우 수하 100여 명만이 그를 따라왔다.
     
이 싸움으로 촉한의 배와 기계, 수군과 육군의 군용물자 등이 일시에 바닥이 났다. 관우의 죽음을 설욕한다는 취지로 대군을 일으켜 동오를 쳤지만, 오히려 자신마저 육손에게 대패해 패잔병을 이끌고 백제성으로 후퇴하는 비참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애초 촉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군사력도 막강했다. 그러나 유비는 육손의 계책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릉의 동서쪽 전선에서 오나라 본영에 맹공을 가했다. 육손이 견고하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려 하지 않자 촉군은 전투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헛되이 시간을 보내게 됐다. 군량미의 보급이 곤란해진 데다가 더위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날로 떨어졌다. 
     
이때 유비는 수륙병진의 유리한 조건을 포기하고 배를 버리고 산속에 요새를 구축했다. 이것이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반격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본 육손이 일제히 공격에 나서 촉군의 요새를 잇달아 함락시키자 유비는 패잔병을 이끌고 백제성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릉대전은 한마디로 말해 유비의 참패였다. 그러나 『삼국연의』는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기를 거부했다. 동오의 맹장 주연이 유비를 추격하던 도중 조운을 만나 죽은 것으로 묘사해 놓은 게 그렇다. 그러나 주연은 이릉대전에서의 무공으로 정북장군(征北將軍)에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좌대사마(左大司馬) 자리까지 올랐다.
     
이릉대전은 백제성으로 패주한 유비가 이내 사망함으로써 삼국시대가 완전히 새롭게 정립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조조와 유비 및 손권으로 상징되는 세 영웅이 자웅을 겨룬 싸움은 사실상 모두 끝나게 되었다. 조비와 제갈량 및 손권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기가 열린 것이다. 이후에 펼쳐지는 사마씨와 강유 및 손호 등의 대립구도를 여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적벽대전처럼 화공으로 유비 군을 패퇴시킨 육손


이릉대전에서 동오군이 승리하는 데 사용된 결정적인 수단은 화공이었다. 화공은 고대전투에서 적군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다. 조조가 원소를 칠 때도 화공을 사용했고, 주유가 조조를 칠 때도 화공을 사용했다. 육손 역시 유비를 칠 때 화공을 구사했다. 똑같은 화공이지만 그 내용은 달랐다.
     
관도대전 당시 조조는 원소와 싸울 때 오소의 군량을 불태우고 군심을 어지럽힌 뒤 다시 승세를 몰아 맹공을 퍼붓는 방식을 택했다. 적벽대전 당시 주유는 조조 군의 함대가 모두 쇠고리로 연결된 것을 이용해 일제히 화공을 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릉대전 당시 육손은 병사들에게 각자 마른 풀과 불씨 등을 지참해 일제히 불을 지르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다. 
     
효과 면에서 쌓아둔 군량미를 불태우거나 한곳에 모여 있는 배를 불태우는 것보다 덜할지 몰라도 700여 리에 걸친 영채에 불을 질렀다는 점에서 보면 오히려 규모가 더 크다. 이릉대전에서 보여 준 육손의 계략이 간단치 않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릉대전 당시 유비는 맹목적인 자신감과 적을 가볍게 여기는 오만함으로 인해 패퇴하고 말았다. 조조가 적벽대전 당시 지나친 자부심으로 인해 패퇴한 과정과 닮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유비의 촉한은 나라가 성립된 지 얼마 안 된 데다 북쪽에 강적인 위나라가 도사리고 있었던 까닭에 결코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었다. 특히 결맹대상인 동오에 대해 개인 차원의 설욕을 할 상황이 더욱 아니었다.
     
유비는 자신이 가장 중시했던 제갈량이 거듭 간했음에도 이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보여 준 이전의 행동과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모두 아우들의 죽음에 격분한 나머지 조급히 설욕을 서두른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릉대전의 참패는 말할 것도 없이 유비가 제갈량의 건의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린 후과다. 조조가 적벽대전 당시 고집을 부리다가 참패를 당한 것과 닮았다.
     
내 생각보다 남의 생각을 자꾸 읽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세계적인 자기계발 컨설턴트이자 미국의 작가인 데일 카네기도 이런 말을 했다.
    

 
“2년 동안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두 달 동안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06. 현모는 희생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