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Sep 19. 2016

05. 마르크스 : 다수를 위한 경제, 사회, 정치

<철학자의 조언>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유령이.”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전 유럽을 향해 선언했다. 처음에는 이 선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요청을 받아 1848년 1월에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작성했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유럽의 모든 강국으로부터 하나의 힘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썼다.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서 ‘공산주의자’는 극소수였다. 〈공산당선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한 공산주의자동맹 또한 조직원이 수십 명에 불과한 작은 조직이었다. 그러나 불과 30년이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독일에 사회민주당이 설립된 것을 필두로, 거의 전 유럽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만들어졌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호소에 맞게 단결하고 투쟁했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성장하는 등 사회주의 정당들은 약진했다.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후 마르크스의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졌다.
     
인구 10억의 대륙,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정치가였다. 인구 13억의 대륙, 중국의 혁명 지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역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자본론(Das Kapital)》을 읽고 투쟁에 나섰다.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이끈 호찌민(胡志明, 1890~1969)도 마르크스의 사상을 배운 사회주의자였다.
     
그뿐인가. 영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 상대성이론을 세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불굴의 인간’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도 모두 사회주의자였다. 이렇듯 마르크스의 사상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모른다면 20세기의 세계사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21세기에는 어떠한가? 마르크스주의는 한때의 유행, 과거의 유물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중국과 베트남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자신들의 사상적 기초로 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경기 침체와 실업, 그리고 빈부 격차의 확대에 자극받아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도대체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이기에 여전히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노동자의 승리는 불가피하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의 서유럽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산업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산업의 중심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토지 독점으로 특권을 누리던 귀족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중세의 신분적 질곡에서 벗어났다.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즉 자본주의사회가 성립되었다. 신분적 질곡에서 벗어나자 누구나 노력만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넘쳐났다. 또한, 산업 생산의 증대로 물질적 풍요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곧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나왔다. 이것이 19세기 서유럽의 한 얼굴, 즉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하는 현실이었다. 
     
이번엔 다른 얼굴을 보자. 영국의 한 위원회가 1863년에 낸 보고서 일부다. 
     
“(위원회의 위원인) 화이트가 심문한 증인 중에서 270명은 18세 미만, 50명은 10세 미만이었다. 10명은 겨우 8세, 다섯 명은 겨우 6세였다. 노동시간은 12시간에서 14~15시간이고, 야간 노동을 하며, 식사 시간은 불규칙했다. 대다수의 경우가 독성이 가득 찬 작업장에서 식사했다. 단테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그가 상상한 처참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광경도 여기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중세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 편〉에 나오는 그 어떠한 광경보다도 영국의 공장 안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훨씬 더 처참할 것이라고 했다. 독성이 가득 찬 작업장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가 하루 14~15시간씩 노동하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이것이 19세기 서유럽의 또 다른 얼굴, 즉 지옥 같은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상의 두 얼굴 중 어느 것에 주목해야 할까? 마르크스는 두 얼굴 모두에 주목했다. 즉 자본주의사회의 성립과 노동자의 고통이 별개가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공유했다. 다만 미래 사회의 성격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다. 당시 유토피아의 도래를 주장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유지를 전제로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전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사회의 주도층은 노동자일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 이렇게 썼다.
     
“소시민은 봉건제적 절대주의 멍에 하에서 부르주아가 되었다. 이에 반해서 근대 노동자는 공업의 진보와 함께 향상되기는커녕 자기 계급의 생존 조건 아래로 더욱더 깊이 가라앉는다. 노동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빈곤자가 되고, 사회적 빈곤은 인구나 부의 증가보다 더 급속히 증대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계급에는 이제 더는 사회의 지배계급으로서 머물러 있을 능력도, 자기 계급의 존재 조건을 규범으로서 사회에 강제할 능력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 부르주아계급이 막연하게 짊어지고 온 공업의 진보는, 경쟁에 의한 노동자의 고립화 대신에 결합에 의한 노동자의 혁명적 단결을 만들어낸다. 그러기 때문에 대규모의 공업 발전과 함께 부르주아계급의 발판으로부터 그들이 생산하고 또 생산물을 취득하고 있던 시스템 토대 그 자체가 제거된다. (…) 그들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승리는 다 같이 불가피하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의 사회적 빈곤은 급속히 증대한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단결하게 되고, 그에 따라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시스템, 즉 자본주의의 토대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승리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기는 자본주의사회가 막 성립하던 때였다. 대부분 사람이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에 축배를 들던 그 시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주장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서유럽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다.
     
     

공부 또 공부!

대학 시절 마르크스는 열렬한 철학도였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철학에 심취했고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인 1842년에 〈라인 신문〉 편집장이 되었다. 나이 24세 때의 일이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사회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두게 되었다. <라인 신문〉은 라인 지방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발행한 신문이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뒤처진 후진국이었다. 독일은 여러 개의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귀족들이 여전히 지배층이었고 인구의 다수인 농민은 귀족들에 얽매인 농노였다. 독일이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변모한 것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였다.
     
〈라인 신문〉은 귀족들의 특권에 대해 비판하는 역할을 했다. 그 논조가 신랄했기 때문에 결국 발행 6개월 만에 폐간되고 마르크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다른 세계였다. 1789년의 대혁명과 1830년 혁명 등 두 차례의 혁명을 통해 귀족과 시민의 투쟁에서 시민이 승리했다. 아울러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이 주목받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를 옹호하는 사상이 등장해 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옹호하는 여러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독일 귀족들을 향했던 필봉을 자본가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의 망명자들이 발행한 〈포어베르츠(Vorwäts)〉에 기고하면서 독일 노동자들을 옹호했다.
     
독일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포어베르츠〉의 주요 기고자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다. 마르크스는 브뤼셀로 이주했다. 1848~1849년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독일로 돌아와 혁명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하자 다시 추방령이 내려졌고 마르크스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마르크스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마르크스는 런던에 거주하며 연구와 혁명 활동을 했다. 영국은 독일은 물론 프랑스와도 다른 세계였다.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거주하는 동안 잠시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차티스트운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18세기 말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나 마르크스가 방문했을 즈음에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차티스트운동은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1838년부터 10년간 벌어진 운동으로, 그 결과 남성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운동을 보며 노동자들의 정치적 단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정치적 압력은 줄어들었지만, 경제적 압박이 마르크스를 괴롭혔다. 자주 이사를 하며 집의 규모를 줄이고, 가재도구를 팔아가며 겨우 생활했다. 마르크스는 가난으로 인해 여러 아이를 잃었다. 일곱 명의 아이 가운데 세 아이가 런던 시절에 죽은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마르크스는 흔들리지 않고 연구와 활동을 이어갔다. 
     
연구의 주제는 자본주의사회였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경제 번영 뒤에 가려진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다. 독일에서는 자본주의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의 현실을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를 옹호하는 사상을 접했지만,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달랐다. 자본주의가 정착하여 발전하면서 그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앞에서 인용한, 6세의 어린 노동자의 상황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례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곧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일어날 일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왜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상황이 처참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힘으로써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각성시키고자 했다.
     
연구는 쉽지 않았다. 그는 밥벌이를 위해 여러 신문에 기고해야 했다. 여러 나라에서 찾아오는 사회주의자들과 모임을 하고, 사회주의자 집회나 노동자 집회에서 강연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자료가 계속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연구한 내용을 계속 재검토해야 했다. 그래서 연구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1867년에야 《자본론》 제1권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10년간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마르크스를 방문했던 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대영박물관에는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매일 공부하던 그곳에 우리도 가보라고 재촉했다. 공부 또 공부! 그가 우리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연구한 끝에 탄생한 《자본론》은 인문 학문과 사회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널리 연구되는 사상가가 되었다.
     
     

19세기 사상가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서문’에서 “나의 연구 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상품’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사회에서는 노동 생산물의 상품 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 형태가 경제적 세포 형태다. 겉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가치 형태의 분석은 아주 사소한 것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은 미생물의 해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작은 것이다.”
   
사람의 신체를 분석한다고 해보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키, 몸무게, 피부색 등등 겉으로 드러난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신체의 일반적 특성이 아니다. 신체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세포 분석에서부터 시작해야 신체의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상품’ 분석에서부터 시작했다. 상품이 곧 자본주의의 ‘세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연구 방법은 그가 19세기의 사상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19세기 유럽에서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과학의 발전이 생산능력의 비약적 증대로 나타나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 학문과 사회 학문에도 과학적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 분석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자연현상과 달리 사회현상은 실험실에서 실험해볼 수가 없다. ‘현미경이나 시약’을 사용한 실험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동원한 방법이 ‘추상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즉 일종의 ‘사고실험’으로 본질적인 것만을 검토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세포라고 생각한 상품의 구체적 특성을 사상(捨象)하고 필요한 특징만을 검토했다.
     
과학적 방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법칙의 발견이다. 과학자들이 과학의 법칙을 발견해내듯이,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은 사회의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해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다. 그 법칙을 두고 그는 ‘자연법칙’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연법칙은 인간이 개입해서 변경할 수 없다. 즉 법칙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관철된다.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보자.
     
“개인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해관계의 담당자로 되는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 구성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로서는 다른 어떠한 입장과는 달리 개인은 이러한 관계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제적 사회 구성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이란 바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법칙이 자연법칙과 같다는 견해를 말한다. 그 법칙은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관철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관철되는 ‘자연법칙’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본주의에서 생산 규모가 비약적으로 증대한다. 그런데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증대한 생산 규모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생산수단을 사회가 소유하게 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필연적인 법칙이다. 자연법칙이므로 이 법칙은 그대로 관철된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는 말인가? 마르크스는 이러한 맹점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법칙과 아울러 혁명 활동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했다. 그러나 법칙과 인간 활동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대부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레닌이 등장하여 그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다. 자본주의의 법칙은 사회주의혁명의 조건에 대해 말한 것일 뿐이고, 인간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레닌의 해결책이었다. 즉 그는 인간의 활동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혁명 정당인 볼셰비키를 조직하여 러시아 혁명을 주도했다. 레닌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상가가 법칙성보다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돈은 만물의 척도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밝힌 자본주의의 법칙은 의미가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자본론》을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서문’에서 ‘상품 분석’이 이해하기 어렵고, 다른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고 했다. ‘상품 분석’ 부분이 ‘추상력’을 이용해 서술했지만, 다른 부분은 당시 영국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당시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영국 국회에 제출된 공장 감독관의 보고서, 혹은 공중위생에 관한 보고서 등에서 뽑은 내용으로 지면의 절반 이상을 채웠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자라면 상품 분석이 이해하기 쉽고 다른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영국의 현실은 오늘날과 너무나 다르다. 6세의 어린이가 하루에 14~15시간 노동하는 것을 오늘날의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반면 상품 분석에서 제시한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마르크스는 상품 분석을 하면서 모든 상품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는다고 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무엇인지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상품은 우선 우리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속성들에 의하여 인간의 어떤 종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물건이다. (…)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이 사용가치가 되게 한다. (…) 사용가치는 오직 사용 또는 소비의 과정에서만 실현된다. 각종 사용가치는 부(富)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건 간에 모든 부의 실질적 내용을 형성한다. 우리가 고찰하는 사회 형태에서는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의 물적 담당자로 된다. 교환가치는 언뜻 보면 양적 관계, 즉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 - 시간과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는 관계 - 로서 나타난다.”
   
사용가치란 한 물건의 유용성을 말한다. 옷을 생각해보자. 옷은 몸을 가려주고 더위와 추위 등 기온 변화에 대처하게 해준다. 이것이 옷의 유용성이고 옷의 사용가치다. 그런데 사람은 옷만으로 살 수 없다. 신발도 필요하다. 그래서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를 교환하여 신발을 얻는다. 이때 교환하는 비율이 옷의 교환가치다. 즉 옷의 교환가치는 신발 한 켤레다. 그런데 옷을 만드는 사람이 신발 한 켤레를 얻는 과정이 쉽지가 않다. 먼저 자기가 만든 옷이 있어야 하는 신발 만드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옷을 가지고 가서 신발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쉽지 않고 번거로운 이 과정을 해결하기 위해 ‘돈’이 출현했다.
     
누구나 필요로 하는 물건을 돈으로 지정해놓으면 교환이 손쉽게 이루어진다. 쌀을 돈으로 지정했다고 하자. 쌀 한 말이면 옷 한 벌이나 신발 한 켤레와 교환할 수 있다. 그러면 옷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옷이 있어야 하는 신발 만드는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다. 신발 만드는 사람이면 아무나 찾아가서 쌀 한 말을 주면 신발 한 켤레와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번거롭다. 쌀 한 말을 들고 다니기가 쉽겠는가. 그래서 누구나 원하면서도 들고 다니기 쉬운 물건을 찾았다. 최종적으로 금이 돈으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돈은 교환의 편리함을 위해 생겨났다. 또한, 돈은 단지 어떤 물건의 교환가치의 표현일 뿐이다. 옷 한 벌이 1만 원이라면, 1만 원이라는 돈은 옷과 신발이 교환될 때 신발 한 켤레가 했던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본주의사회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가치가 뒤바뀌는 가치 전도가 일어났다. 단지 교환의 편리함 때문에 도입된 돈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물건이든 팔기 위해 생산하기 때문이다. 1억 원어치의 옷을 만들어 창고에 쌓아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이 안 팔리면 옷 만드는 사람은 파산할 뿐이다. 빨리 팔아서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옷을 빨리 팔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된다. 광고도 하고 브랜드를 갖다 붙인다. 광고나 브랜드는 옷의 유용성, 즉 사용가치와 관련이 없다. 옷의 교환가치와만 관련된다. 다시 말해 옷을 만드는 사람은 광고하고 브랜드를 붙임으로써 옷의 교환가치를 높이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다.
     
소비자는 어떠한가. 옷의 편리성이나 내구성 같은 사용가치보다 옷의 모델이 누구인지, 어느 브랜드의 옷인지에 더 관심을 둔다. 소비자들 역시 교환가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돈의 역할 때문이다. 고가의 모델을 사용하고 고가의 브랜드를 붙인 옷이 더 근사해 보이고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돈은 단지 어떤 물건의 교환가치를 표현한다. 그런데 옷 한 벌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신발 한 켤레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돈이 이제는 거꾸로 그 물건의 가치를 정해주게 되었다. 돈은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옷을 만드는 사람은 빨리 옷을 팔아 돈을 쌓아두려고 한다. 현금이 많아야 행세하는 기업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돈이 정해준 가치를 그대로 믿고 구매를 한다. 그 모델이 입은 그 브랜드의 옷을 입어야 주변에서 인정받기 때문이다.
     
가치 전도 현상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태도다. 인간조차 돈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존재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인간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피스트들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구호가 바뀌었다. “돈이 만물의 척도다!” 마르크스는 상품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를 폭로했다.
     
     

무엇이 정의인가.

마르크스는 가치 전도 현상이 곧 ‘물신숭배’라고 했다. 물신숭배란 어떤 물건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 숭배가 그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곰이 어떤 신령스러운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람들도 어떤 물건이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상품 형태나 이 상품 형태가 표현하는 바의 노동 생산물의 가치관계는 노동 생산물의 물리적인 성질이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데, 인간의 눈에는 이 관계가 마치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상태로 나타난다. (…)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부착되며, 따라서 상품 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노동 생산물의 가치관계”를 표현하는 교환가치는 “노동 생산물의 물리적인 성질”, 즉 물건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 즉 자기의 물건을 서로 교환하는 사람들이 정한 교환 비율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건이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이런 환상을 품게 하는 물건의 귀착점은 ‘돈’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환상이 “상품 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즉 돈에 대한 물신숭배는 자본주의사회의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돈에 대한 숭배가 낳는 폐해를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산도 그중 하나다. 이 현상을 두고 ‘경영 합리화’니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니 하며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확산하는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경영 합리화’니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니 하는 말들은 이익에 대한 자본가의 열망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은폐해줄 뿐이다. 비정규직 확산은 자본가의 ‘돈’ 욕심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제까지의 모든 운동은 소수자의 운동, 또는 소수자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인 다수자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인 다수자의 자립적 운동”이라고 했다. 그는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경제, 다수를 위한 사회, 다수를 위한 정치를 갈망했다. 그의 사상은 그것을 위한 이론적 모색이었고, 그의 인생은 그것을 위한 실천이었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정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07. 경청하고 또 경청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