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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0. 2016

06. 묵자 : 통치자는 백성을 동등하게 사랑하라.

<철학자의 조언>

중국 전한 시대 회남왕 유안(劉安, B.C. 179?~B.C. 122)이 지은 《회남자(淮南子)》의 〈태족훈(泰族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묵자를 따르는 제자가 180명에 달했다. 묵자는 그 제자들을 불 속에 뛰어들게 하거나 칼날을 밟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죽을지라도 제자들은 발뒤꿈치를 돌려 달아나지 않았다. 모두 묵자에게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묵자(墨子, B.C. 480~B.C. 390)


 
묵자(墨子, B.C. 480~B.C. 390)는 묵적(墨翟)을 높여 부른 이름이다. 묵자와 제자들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제자들은 스승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랐다고 했다.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정치적 결사체 수준의 관계였다고 할 것이다. 묵자의 제자가 180명이었다고 했다. 공자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한 제자가 70명이었음을 고려할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공자를 따르는 제자 집단을 유가라 불렀듯이 묵자를 따르는 제자 집단을 묵가(墨家)라고 불렀다. 묵가는 공자 사후 나타난 가장 큰 학문 집단이었다.
     
묵자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10여 년 뒤에 태어났다. 그러나 공자가 활동했던 시대와 묵자가 활동했던 시대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공자는 춘추시대 후기에 활동했고, 묵자는 전국시대 초기에 활동했다. 춘추시대는 주나라가 존재하는 가운데 형식적이나마 주나라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던 제후들이 다투던 시대였다. 반면 전국시대는 주나라가 사라지고 일곱 개의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시대였다.
     
전쟁의 규모도 달라졌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무사 집단 위주의 소규모 전쟁으로 기껏해야 하루면 끝나곤 했다. 반면 전국시대의 전쟁은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병사를 동원한 대규모 전쟁으로 몇 년간 이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는 인명 피해가 엄청나게 커졌고 또한 전쟁의 양상 역시 매우 잔인해졌다. 기원전 260년에는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가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 명을 참수하기도 했다.
     
춘추시대에는 주나라 중심의 주종관계가 회복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공자가 주나라의 문물을 뜻하는 예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달랐다. 이미 사라진 주나라의 문물을 말하는 것은 흘러간 레코드판을 트는 것에 불과했다.
     
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상가가 나타났다. 사상가들은 전국을 유세하며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했다. 다행히도 사상가들을 처형하는 나라는 없었다. 오히려 각국의 왕들은 사상가들을 초빙하여 의견을 듣고자 했다. 패권을 잡기 위해 사상가들의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전국시대에 최초로 나타난 사상가였고, 또한 공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사상가였다. 장자나 한비자 등도 공자를 비판했지만, 그들은 묵자 이후의 사람들이었다.
     
     

겸애하면 이익을 얻는다.

묵자의 사상과 공자의 사상은 어디에서 갈라졌을까? 묵자와 공자는 모두 성인(聖人)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묵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했다. 반면 공자는 완전한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성인이라 했다. 묵자가 바람직한 통치자 상으로 성인을 제시했다면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성인을 제시했다. 
     
요순 임금을 예로 들어보자. 묵자와 공자는 모두 요순 임금을 성인이라 했다. 그러나 강조점이 달랐다. 묵자가 통치를 잘한 임금으로서 요순을 받들었다면 공자는 통치자보다는 도덕성을 갖춘 바람직한 인간으로서 요순을 받들었다. 이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묵자가 통치자가 해야 할 일을 밝히고자 했다면 공자는 인간의 올바른 삶을 역설했다. 
     
묵자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 보자. 천하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묵자는 혼란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병을 고치려면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하지 않는가. 묵자는 당시의 혼란상을 세 가지로 예시했다. 국가 간의 전쟁, 집안 간의 상호 약탈, 사람 간에 서로 죽이는 잔혹함이 그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혼란이 생겼는가? 묵자는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 생기는 폐해는 실로 심각하다. 묵자는 그 폐해를 이렇게 요약했다.
     
“지금 제후들은 단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할 줄만 알지 남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나라의 힘을 동원하여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 집안의 가장은 단지 자신의 집안만을 사랑할 줄 알지 남의 집안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집안을 동원하여 남의 집안을 빼앗는 데 꺼리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몸만 사랑할 줄 알지 남의 몸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몸을 써서 남의 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들에서 전쟁하게 되고, 집안의 가장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서로 빼앗게 되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서로 해치게 되며, (…) 천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한 자가 반드시 약한 자를 잡아 누르고, 부자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귀한 사람들은 반드시 천한 사람들을 깔보고, 사기꾼은 반드시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빈부귀천으로 갈리고 강자, 부자, 귀족이 약자, 가난한 자, 천민을 깔보고 무시하며 억누른다고 했다.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사회에 만연하여 현실이 혼란스럽고 참담해졌다는 것이다. 혼란의 원인을 알았으니 혼란을 극복할 처방을 찾을 수 있다. 서로 사랑하면 혼란스럽고 참담한 현실을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을 겸애 사상이라고 한다. ‘겸’은 ‘똑같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겸애란 ‘똑같이 사랑’하는 동등한 사랑을 말한다.
     
겸애는 누구나 가져야 할 마음이지만 특히 통치자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똑같은 백성인데 빈부귀천을 따져 차별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통치자는 백성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 통치자가 겸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묵자는 겸애하면 천하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즉 겸애는 천하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묵자는 성인, 즉 통치자가 해야 할 일이 “천하의 이익을 얻기 위해 천하의 폐해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천하의 이익이란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말한다. 묵자는 통치의 기준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
     
“무엇을 세 가지 기준이라 하는가? (…) 근본을 마련하는 것, 근원을 따지는 것, 실천하는 것이다. 무엇에다 근본을 마련하는가? 위로 옛날 성왕들의 일에 근본을 둔다. 무엇에서 근원을 따지는가? 아래로 백성들이 듣고 본 사실에서 근원을 따져야 한다. 무엇에 실천을 두는가? 형법과 행정을 시행하여 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부합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에 표준이 있는 것이다.”
   
세 가지 기준 중 나라와 백성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 묵자가 보기에 나라와 백성의 이익이 모든 가치 결정의 기준이다. 근대 유럽의 공리주의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공리주의의 원조라는 영국의 사상가 벤담 역시 인간의 이익이 가치판단의 기준이라고 했다. 묵자와 벤담의 차이점은 묵자가 겸애를 이익의 수단으로 주장했다면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수단으로 주장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군자가 아니다.

묵자의 공자 비판은 신랄했다. 왜 그랬을까? 공자는 묵자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주장했다. 공자는 자신의 핵심 사상인 ‘인’을 ‘애인(愛人)’,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묵자는 젊었을 때 공자의 가르침을 공부했고 공자가 주장한 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묵자가 볼 때 공자의 주장은 미흡했다. 공자에 따르면 부모에 대한 사랑이 가장 소중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이 똑같을 수는 없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한 사랑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사랑은 친소관계에 따라 차등적일 수밖에 없다.
     
묵자는 차등적 사랑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묵자》에서 차등적 사랑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박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대신 묵자는 공자의 행태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그 예를 보자.
     
공자가 채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궁지에 빠져 명아주로 만든 국만으로 싸라기도 없이 열흘을 지냈다. 제자인 자로가 돼지고기를 구해 삶아주자 공자는 고기가 어디서 났는지를 물어보지도 않고 먹었다. 남의 옷을 벗겨 그것을 팔아 술을 사다 주자 공자는 술이 어디서 났는가를 물어보지도 않고 마셨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를 맞아들이니 그는 방석이 반듯하지 않아도 앉지 않았고 고기가 바르게 썰어져 있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자로가 나아가 물었다.
“어찌 그토록 진나라와 채나라에 있을 때의 태도와 반대가 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이리 오너라. 네게 얘기해주마. 전에는 너와 함께 살아가기에 급급했지만, 지금은 너와 함께 의로움을 행하기에 급급하다.”
   
묵자는 공자의 행동이 “굶주리고 곤궁할 때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부유하고 배부르면 허위적 행동으로 자신을 꾸미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공자를 향해 “더럽고 사악하다.”고 비난했다. 묵자가 비판한 것은 공자의 언행 불일치였다. 묵자의 공자 비판에 공자의 제자들은 수긍할 수 없었다. 단지 스승인 공자를 비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묵자의 주장은 공자의 제자들로서는 묵과할 수 없었다. 다음의 비판을 보자.
     
“도의와 방법, 학술, 사업을 통일하는 것이 어진 것이다. 크게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작게는 벼슬자리에 나아가며, 멀리는 두루 널리 베풀고 가까이는 자기 자신을 수양한다. 의롭지 않은 곳에 처신하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천하의 이익을 일으키기에 힘쓰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이롭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이것이 군자의 도다. 그런데 내가 들은 공자의 행동은 곧 근본적으로 이것과 서로 어긋난다.”
   
이 비판 역시 공자의 언행 불일치를 겨냥한 것이다. 천하의 이익이 되도록 실천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했다. 공자는 그런 도리를 따르지 않았으니 군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라면 이 비판을 듣고 발끈했을 것이다. 어찌 군자의 도리가 이익 추구에 있다는 말인가. 공자의 제자를 자처하는 맹자가 분개해서 나섰다.
     
     

어찌 이익을 말하는가!

맹자는 묵자가 죽고 약 20년 후에 태어났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일생을 두고 다른 사상과 논쟁을 벌였다. 그런 이유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맹자는 논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양주와 묵적의 이론이 온 천하에 가득 차게 되었네. 천하의 이론은 양주에게 붙는 것이 아니면 묵적에게 붙는 것이 되었네. (…) 양주와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공자의 도는 드러나지 않을 걸세. 그것은 사악한 이론이 사람들을 속여 어짊과 의로움의 도를 틀어막아 버리기 때문이야. 어짊과 의로움이 틀어막혀 버리면 곧 짐승들을 거느리고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들끼리도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일세. 나는 이런 것이 두려워서 옛 성인의 도를 지키면서 양주와 묵적의 이론을 막아 방탕한 말과 사악한 이론을 펴는 자들을 몰아내어 더 생겨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일세.”
   
여기서 묵적은 묵자를 지칭한다. 양주는 개인주의인 위아 사상을 표방한 사상가였다. 맹자는 양주와 묵자의 사상이 천하에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약 공자의 사상이 사라지면 인간성을 상실하는 극단적 상황이 초래될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맹자는 분투했다. 맹자는 묵자에 대해 “천하의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니 그에게는 부모도 없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비판이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맹자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묵자의 제자인 이지(夷之)에게 한 말을 보아야 한다. 이지는 맹자에게 겸애가 공자의 사상과 같은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에 맹자가 역으로 물었다.
     
“정말로 사람들이 그의 형의 아들을 친근히 여기는 것과 그의 이웃 어린아이를 친근히 여기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 두 사랑은 같을 수 없다. 당연히 형의 아이를 이웃집 아이보다 더 사랑한다. 따라서 동등한 사랑이라는 겸애는 불가능하다. 사랑은 친소관계에 따라 차등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정도의 차이라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랑은 똑같지만, 사랑의 실천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정리하면 될 문제다. 그러나 맹자는 묵자의 사상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맹자는 묵자의 사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맹자와 송경(宋牼)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송경은 송나라의 학자로 묵자를 지지했던 모양이다. 송경은 진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을 막기 위해 두 나라 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맹자를 만났다. 맹자가 대뜸 물었다.
     
“저는 자세한 내용까지 여쭙지 않겠으나 그 요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그분들을 어떻게 설득하려 하십니까”
“나는 전쟁이 이롭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려 합니다.”
“선생의 뜻은 큰데, 선생의 명분은 좋지 않습니다. (…) 어찌 반드시 이로움입니까”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이익을 앞세우면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이 맹자 사상의 기초다. 맹자는 이익을 앞세우는 공리주의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배격했다. 양나라 혜왕에게 들려준 맹자의 충고는 맹자 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혜왕이 “우리나라에 이익이 될 방책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묻자 맹자는 정색하며 말했다. “어찌 이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까? 왕께서는 오로지 인의(仁義)의 덕만을 추구하시면 됩니다.”
   
맹자의 사상은 성선설을 바탕으로 한다. 맹자는 인간이 본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본성이 흐려졌다고 주장했다. 맹자가 볼 때 묵자의 사상은 이익을 앞세우는 사상이다. 묵자는 겸애하여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익 추구는 착한 본성을 흐릴 뿐이다. 묵자의 사상이 퍼지면 앞다퉈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 착한 본성이 사라지면서 인간은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맹자는 묵자의 사상과 극렬하게 싸웠다.
     
     

윗사람과 뜻을 같이하라.

묵자와 맹자의 차이는 정치관에서도 드러난다. 묵자는 통치자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백성들이 원시생활을 하여 형정의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대개 그들의 말은 사람마다 그 뜻이 달랐다. 그래서 한 사람이면 한 가지 뜻이 있었고, 두 사람이면 두 가지 뜻이 있었으며, 열 사람이면 열 가지 뜻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말하는 뜻도 많아졌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뜻을 옳다고 하면서 남의 뜻은 비난했으니,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비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정 안에서는 부자나 형제들이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었고 서로 화합・공생하지 못했다. (…) 천하의 혼란은 마치 새나 짐승들이 뒤섞인 것과 같았다. 천하가 혼란해지는 까닭은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을 골라 천자로 삼아야 한다.”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홉스가 말한 국가의 기원을 연상케 한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혼란을 겪자 통치자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권이 백성에게 있다고 주장하려는 말은 아니었다. 당대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제시하기 위한 말이었다. 혼란을 극복하고 나라가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묵자는 “언제나 윗사람과 뜻을 같이하고 결코 아랫사람을 따르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부연한 부분을 보자.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듣게 되면 모두 그것을 윗사람에게 고하라. 윗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반드시 모두 그것을 옳다고 여기며, 그르다고 여기는 것은 반드시 모두가 그르다고 여겨야 한다.”
   
결국, 통치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 백성들이 자기주장을 내세우게 되면 또다시 혼란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물론 묵자는 통치자가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겸애를 실천하여 나라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그러나 묵자의 주장은 왕의 일방적 전횡을 뒷받침할 사상을 제공할 위험성이 있었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무겁고 왕이 가장 가볍다.”고 했다. 임금은 “백성이 원하는 것을 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 물론 국가의 주권이 백성에게 있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귀하게 여기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민본(民本)’, 즉 백성을 근본에 두는 사상이라고 한다.
     
민본 사상에 입각하면 왕의 전횡은 용납될 수 없다. 맹자는 여러 차례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왕을 교체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맹자는 왕이 추구해야 할 정치를 ‘왕도정치(王道政治)’라고도 했다. 왕도정치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넓혀서 도달한 정치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못 보는 마음이 있다.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은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못 보는 마음이 있어서 이에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못 보는 정치를 했다.”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공자가 말한 인이 겉으로 드러난 마음이 바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다. 맹자는 이 마음을 측은지심이라고도 했다. 왕도정치는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정치다. 맹자가 볼 때 묵자가 주장한 정치는 왕이 이익을 내세워 전횡하는 패도정치(覇道政治)일 뿐이다. 묵자의 정치관은 공리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통치자는 백성에게 이익이 되도록 천하의 혼란을 바로잡아야 하고, 백성은 통치자의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 반면 맹자의 정치관은 도덕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의 착한 본성에 바탕을 두고 덕의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묵자의 소중한 가르침

진시황이 최종 승자가 됨으로써 전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전국시대 이후 묵자의 사상과 공맹의 사상은 운명이 달라졌다. 묵자의 사상은 소멸했고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계승한 유교는 중국 중세 시대의 지배적인 철학이 되었다. 왜 이렇게 운명이 달라졌을까? 
     
묵자의 사상은 통치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통치자가 거부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통치자들이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운다고 해도 겸애를 실천하고자 하겠는가. 통치자들은 바람직한 통치의 전제인 겸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교 역시 통치자를 대상으로 덕의 정치를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교는 통치자만을 대상으로 한 사상이 아니었다. 유교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고자 했다. 통치자가 유교를 거부한다고 해도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려는 이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주장은 빈부귀천을 떠나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묵자가 주장한 ‘절용(節用)’ 또한 당대의 백성들에게 환영받기 어려웠다. 절용은 절약해서 사용한다는 말이다. 묵자는 옛 왕이 절용의 법도를 정하면서 따랐다는 선언을 인용했다. 
     
“모든 천하의 여러 공인은 수레를 만들거나 가죽으로 물건을 만들거나 질그릇을 만들거나 가구를 만들거나 할 때 각기 자신의 능력대로 일하도록 한다. 그리고 모든 물건은 백성들이 사용할 만큼만 만들면 된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여 재료의 낭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취지다. 합당한 얘기 같지만, 문제가 있었다.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의 양은 통치자에 의해 정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백성들은 평균적인 삶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백성들에게 내핍 생활이 강요될 수도 있었다. 묵자를 따르는 집단인 묵가의 생활을 보자. 장자는 이렇게 썼다.
     
“(묵자는) 후세의 묵가들에게 털가죽 옷과 칡베 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법도로 삼게 했다. (…) 후세의 묵가들이 반드시 자신을 괴롭힘으로써 넓적다리에는 살이 없고 정강이에는 털이 없도록 만들어주고 있을 따름이다.”
   
묵가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며 쉬지 않고 일을 했다는 얘기다. 이런 생활을 백성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전국시대에 백성들은 하루하루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살았다. 묵자의 절용은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맹자는 ‘의식족지예절(衣食足知禮節)’이라 하지 않았던가. 살 만해야 예절을 갖출 수 있다는 말이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맹자의 말이 더 다가왔을 것이다.
     
묵자의 사상은 당대 통치자들에게 거절당했지만, 겸애와 절용의 의의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겸애와 절용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지금의 시대에는 약육강식의 법칙과 승자 독식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갑질’ 같은 가진 자들의 횡포, ‘흙수저론’에서 나타나는 부와 빈곤의 세습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절망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라는 옛 노래의 가사처럼 행복을 다 함께 누리기 위한 토론과 실천이 절실한 시대다. 겸애는 그 토론과 실천의 바탕이 되는 정신이다. 또한, 우리는 절용이 절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박탈감, 자원 낭비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는 시대에 묵자의 가르침은 소박하지만, 정곡을 찌른다.
     
“그들이 옷을 지어 입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겨울에는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더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무릇 옷을 만드는 원리는 겨울에는 더 따스해지도록 하고 여름에는 더욱 시원해지게 하는 것이다. 화려하기만 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제거해버렸다. 그들이 집을 지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겨울에는 바람과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더위와 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도적이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서 더욱 튼튼히 만든다. 화려하기만 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제거해버렸다.”
   
그들(백성)에게 옷과 집은 더위와 추위를 피하려고 필요할 뿐이다. 화려함을 추구할 이유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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