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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0. 2016

05. 강대국의 횡포를 고발한다.

<미술, 세상을 바꾸다>

알프레도 자르는 지도를 많이 사용하는 작가이다. 그는 언제나 페터스 도법의 세계전도를 사용하고 있고, 모든 사람이 그 지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유럽과 미국 등 강대국 중심의 세계해석을 비판하면서 지도안에 뿌리 깊이 박힌 미국과 유럽 중심의 시선과 관습을 해체, 교정하고자 한다.


자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메리카 로고>이다. 1987년 뉴욕 브로드웨이의 중심가 타임스 스퀘어에 전광판으로 펼친 이 작품 또한 잘못된 상식과 이미지에 대한 도전이었다. 미국 지도를 보여준 후 “이것은 아메리카가 아니다”라고 쓰고, 미국 국기를 보여준 후 “이것은 아메리카 국기가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다음에 캐나다에서 멕시코, 칠레, 브라질에 이르는, 즉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를 모두 보여주면서 큰 글씨로 이것이 “아메리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일 뿐, 그것을 대표하거나 상징할 수 없다. 누구나 아는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으로 ‘아메리카’를 미국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알프레도 자르, <아메리카 로고>, 1987. 뉴욕 타임스 스퀘어


그는 이렇게 정치권력에 의해 자행된 잘못된 습관과 상식에 도전하고 발언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누구의 입장에서 발언하는가인데, <아메리카 로고>에서처럼 그는 언제나 패권을 쥔 입장이 아닌 반대편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낸다. 주도권을 가진 쪽, 권력을 가진 쪽, 상대적으로 강한 쪽의 입장이 아니라 약하고 못 가진 쪽의 입장에서 발언한다. 그래서 미국보다는 중남미의 입장, 유럽보다는 아프리카의 입장, 제1세계가 아닌 제3세계의 위치에서 발언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갑을관계에서 그는 을의 입장에서 발언하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갑의 나라에서 예술활동을 하면서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윤리적·철학적·미학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이 이끌고 있다는 이 세계가 정의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라고, 그리고 “당신들이 하는 일방적인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다. 이제 을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자르가 작품을 통해 줄곧 하는 말을 한마디로 줄이면 이렇다. “과연 이 세상은 정의로운가?”


지리 = 전쟁

2010년 여름, 시카고 동시대미술관에서 알프레도 자르의 작품 <지리=전쟁>과 만났을 때, 나는 감동에 사로잡혀 한동안 미술관을 떠나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관련 서적과 인터넷 등에서 그에 대한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2년 베를린에서 그의 회고전이라 할 수 있는 《The Way It Is》를 보았다.

사실 이미 여러 책에서 <아메리카 로고>를 보았지만, 나는 그 작품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에 글자를 내건 것을 보면서 수년 전에 본 제니 홀저의 아류라고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지리=전쟁>은 달랐다. 대부분 작가가 자기 혹은 주변과 관련된 것들을 얘기하고 있다면, 자르는 자기 주변이 아닌 그보다 훨씬 넓은 이 세계에 대해 발언하고 있었다. 세계의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알프레도 자르, <지리=전쟁>, 사진 듀라트랜스, 라이트박스, 55갤런 철드럼통, 물, 1991. 시카고 동시대미술관


전시장은 어두웠다. 넓은 방 한쪽에 늘어서 있는 드럼통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원유처럼 보이는 검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위로 사진들이 반사되고 있었다. 액체 표면에 반사되는 이미지는 얼굴을 가리거나 천진스런 표정으로 모여 서 있는 아이들과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흑인 소년들이었다. 액체가 채워진 드럼통 위에 이미지가 있는 라이트박스를 비춰 영상들이 나타나게 하는 방식이므로, 관람객은 드럼통과 라이트박스 사이에 비치는 영상들을 고개 숙여 바라보아야 했다. 어두운 방 안의 검은 드럼통과 거기에 비치는 이미지가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카탈로그에 실린 비평가의 작품설명을 보니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이 작품에서 알프레도 자르는 독특한 라이트박스 컬러사진과 48개의 드럼통으로 서구 기업이 개발국에 행하는 비극적인 착취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사진들은 1989년 나이지리아 남서부의 포구마을 코코에서 벌어지던 독극물의 재앙을 기록한 것이다. 1987년 8월에서 이듬해 5월 사이에 5척의 이탈리아 유조선이 독극물을 싣고 와 코코에다 부렸는데, 마을 농부 중 한 사람이 매달 백 달러를 받기로 하고 독극물을 거기에 두는 것에 동의했다. 주민들은 (폐유로 가득 찬) 몇몇 드럼통을 비워 음식물을 담는 데 사용했다. 어떤 것들은 불이 붙어 폭발하기도 했고, 지하수에 스며들기도 했다. 물에 비치는 이 영상은 우리에게 소비자의 역할과 착취적인 세계 경제 구조 속에서 우리가 얻은 이득과 혜택에 대해 심각히 생각하게 한다.


<지리=전쟁> 시리즈는 1990년부터 여러 형태로 발표돼왔다. 라이트박스에 지도를 그리고 이탈리아와 나이지리아를 오가는 유조선의 항로를 그린 작품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탈리아 유조선이 나이지리아로 가서 독극물 폐유를 내려놓고 거기서 원유를 싣고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자르는 이 유조선의 왕복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유럽과 미국 등의 제1세계에 묻는다. “너희가(우리가) 아프리카에 이런 짓을 하고 있다. 보아라. 이래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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