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도구 네 가지를 동등하게 키워라
앞선 연재에서 살펴본 대로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감각, 이를 비교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통합하는 이성과 감성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물론 해석과 사고의 도구인 언어와 이미지도 키워야 한다. 그런데 이 구성요소가 자라는 시간, 즉 학습과 경험을 통해 감각, 이성, 감성, 인어와 이미지가 커지는 시간은 동시에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이 시간을 달리 표현하면 ‘나이’다.
나이가 우리에게 빼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불행하게도 학습과 경험이 계속됨에 따라,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한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공부를 잘하게 하는 구성요소를 편애한다. 그중에서도 좌뇌에 집중되는 이성을 주로 편애하며 키운다. 입력으로서의 감각, 우뇌로 작동하는 감성과 통합 능력, 언어와 이미지는 소외되기 일쑤다. 그러나 계속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구성요소를 같은 차원으로 키워야 한다. 특히 좌뇌의 이성과 우뇌의 감성은 한쪽이 상대적으로 너무 커지면 다른 한쪽을 무시하기 쉽다.
먼저 감각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감각은 선천적으로 얻은 감각 지각능력의 범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선천적인 시각이나 청각 능력 등은 시간이 흘러도 특별하게 좋아지지 않는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감각 지각능력은 점점 떨어진다. 감각도 육체 일부분이니 노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다만 특별한 노력으로 능력을 일정 부분 키울 수는 있지만, 시간을 계속 거스를 수는 없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리고, 잘 안 느껴진다는 의미다. 이는 나이가 들면 입력이 부식해진다는 말과 같다. 공부의 재료가 잘 안 들어오는 것이다.
(야자수 줄기를 닮은 설계로 모든 거주자가 해변을 소유하게 했으며, 줄기를 둘러싼 하나의 둥근 방파제가 모든 해변을 보호하고 있다. 팜 주메이라 외에 팜 즈벨알리, 팜 데이라가 있으며, 세계지도 형태의 인공섬이 있다.)
언어와 이미지 획득 및 사용 능력은 성인이 되면서 대부분 굳어진다. 직업적 연관성이 적거나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습득하는 언어와 이미지 영역이 있지만, 그에 비해 잊혀 사라지는 영역이 더 크다. 자신이 집중하는 언어나 이미지 영역 밖의 능력은 쇠퇴한다는 의미다. 건축가라면 건축가가 된 이후로 건축물에 대한 이미지 이해는 커지겠지만,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운 음악 기호는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음악 기호에 관한 관심조차 사라진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위에서 보면 사각형, 한쪽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 다른 한쪽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인 물체’는 무엇일까? 사각뿔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보면 사각형, 한쪽 측면에서 보면 사각형, 다른 한쪽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인 물체’는 무엇일까? 쉬운 문제지만, 성인은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반면에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면 30% 이상이 바로 이 물체를 떠올린다. 지금은 형태가 다양해졌지만, 오래전의 텐트 모양이 이 문제의 정답이다. 삼각기둥을 90도 눕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일까? 위 문제의 정답이 텐트 모양 외에는 없는 것일까? 단순히 기억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 그러니까 외우는 공부만 한다면 대부분은 우뇌에 저장된 하나의 정답만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아래 그림과 같은 물체도 있다. 책받침과 같은 이차원의 삼각형과 사각형을 눕히고 세워서 만든 물체다. 언어와 이미지를 키우는 공부를 지속하지 못하면 아는 세계에 갇히는 엄청난 불행이 찾아온다.
사각형의 바탕에 한 쪽 대각선으로 사각형을, 다른 쪽 대각선으로 삼각형을 세웠다.
그렇다면 우뇌에 담긴 감성은 어떻게 될까? 사실 ‘감성(感性, Sensibility)’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감성은 잘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과 상황에 몰입되어 눈물을 줄줄 흘렸던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거의 비슷한 감성적 특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풍부한 감성적 체험과 학습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움직인다. ‘교육’, ‘사회’, ‘적응’과 같은 단어들에 ‘감성’은 억압되고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는 좌뇌의 ‘이성’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오해하며 길든다.
<천재들의 공부법>이 말하는 공부는 공부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창조성’이다. 그럼 이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거꾸로 젊은 나이에는 왜 창조적일 수 있는지 세 가지만 생각해 보자. 첫 번째는 역설적이지만 아직 학습과 경험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창조적이다. 아직도 공부하고 탐험할 미지의 세계가 많아서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아직 덜 채워진 상태가 젊음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스펀지처럼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로 설명한 학습과 경험이 적다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학습과 경험이 적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직 이성의 크기가 감성에 비해 큰 차이를 보일 정도로 커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좌뇌의 이성이 우뇌의 감성과 교류할 수 있는 폭이 넓다. 한 가지가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요소의 영향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창조성의 가장 큰 방해요소가 된다. 새로움에 행복해하고 통합적 시각을 만들어주는 감성의 속삭임을 이성이 점점 귀찮게 여기는 것이다. 아이들은 구름을 보며 토끼와 나비를 떠올리지만, 어른들은 하늘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젊은이들의 특성인 ‘열정’이다. 결과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오더라도 다시 도전하고 끝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치는 시기가 이때다. 새로움은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전하고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다. 여러 번 강조해서 설명했지만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행동’으로 바꾸지 않으면 머릿속 ‘관념’의 세계를 뚫고 현실로 나올 수 없는 것이 ‘생각’이다. 창조성은 생각을 행동으로 바꾼 결과물이다. 어른들은 말한다. “그게 되겠어?” 하지만 현명한 어른들은 말한다. “그거 해보기나 했어?”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가정해 보자. 주로 좌뇌의 이성을 키우는 학습과 경험이 누적되어 왼쪽 머리가 훨씬 커졌다. 하지만 이성에 억압당한 감각은 무뎌지고 나이에 노화하면서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내지 못한다. 새로움을 촉발하는 감성의 불꽃은 ‘애들도 아니고 왜 그래?’ 하는 이성의 핀잔에 꺼지기 직전이다. 계속 만들어지는 언어와 이미지는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져 그 세계에 들어가는 일조차 두려워진다. 새로운 신조어 하나를 모르면 그와 연관된 모든 세계를 부정해버린다. 내가 모르는 세계는 공부의 대상에도 넣지 않는다. 하지만 모르니까 공부하는 것 아닌가?
정작 더 큰 문제는 너무 많은 경험의 결과가 쌓였다는 점이다. 점점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 그러니까 앞서 살펴본 대로 공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창조적 작업에 사용할 머릿속 데이터가 낡고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나이에 따른 경험은 고정관념을 만든다. 수많은 성공과 실패가 편견과 고집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이 젊어서 여러 번 실패했던 일을 시도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가엽고 한심하게 보이겠는가?
그런데도 나이는 인간이 가진 공부의 욕구와 공부를 통한 창조성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행동하게 하는 ‘열정’이 나이만큼 빨리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열정은 이성에도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감성에 더 큰 에너지를 공급한다. 감성에 공급된 열정은 좌뇌에 지배되지 않는 우뇌, 감각, 언어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열정이 있는 사람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공부에 시간이 걸리면 어떤가?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않겠는가? 행동할 열정만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