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왜 언어와 이미지의 크기가 생각의 크기인가?

생각의 크기는 언어와 이미지가 규정한다

by 더굿북

언어(言語, Language)는 음성이나 문자와 같이 의미가 내재한 소통과 표현의 수단이다. 이미지는 그림이나 영상과 같은 이차원적 형태로도 존재하고 건축물이나 연필과 같은 삼차원적 형태로도 존재한다. 사실 이렇게 언어와 이미지를 정의하면 언어와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세계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관념(觀念, Idea)으로서 아직 세계에 어떠한 형태로도 표현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생각’과 같은 것을 제외하면 모두 언어와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관념의 세계는 아직 실제 세계에 나오지 못한 머릿속 생각의 세계다. 실제 세계에 나오려면 관념은 언어와 이미지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관념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실제 세계에 나올 때 언어와 이미지의 옷보다 커질 수는 없다. 그래서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세계에 존재하게 했던 사람의 언어와 이미지의 크기 안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언어와 이미지의 크기를 키워야 하는 당연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류의 언어와 이미지의 크기가 작았던 때에는 어떻게 관념의 세계를 실제 세계로 드러냈을까? 그리고 그것을 현대인의 언어와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먼저 하면, 현대인의 언어와 이미지로 오래된 과거의 언어와 이미지를 해석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더 먼 과거일수록 그렇다. 왜냐하면, 과거의 언어와 이미지를 온전히 이해한 다음에 현대의 언어와 이미지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와 이미지의 이질감도 원인이지만, 언어와 이미지가 덜 발달했던 시기에는 표현의 한계가 너무 작았던 것도 원인이다. 그러니까 생각의 세계에서 온 관념을 표현할 언어와 이미지가 그 당시에는 별로 없었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모든 것을 몇 안 되는 방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05. 언어와 이미지의 감옥을 벗어나라.>에서 예로 든 주술사를 생각해 보자.

04.jpg?type=w1200 <주술사> 벽화

프랑스의 알리에주(Allier)에 가면 구석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레 트로아 프레르(삼형제, Les Trois-Freres)라는 동굴벽화 유적이 있다. ‘삼형제’라는 이름은 이를 발견한 베구엔(H. Begouen, 1863~1956)의 세 아들에서 유래했다. 동굴의 길이는 700m 이상으로 가장 안쪽의 방과 근처의 좁고 긴 복도인 측랑(側廊, Aisle)에서 여러 가지 벽화가 발견되었다. 그림은 곰, 영양, 사자, 말과 같은 야생동물들을 주로 표현하였다.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는데 그것은 「주술사」라고 명명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사슴의 뿔, 올빼미를 닮은 얼굴, 영양의 수염, 말의 꼬리를 가졌고 인간의 손과 발을 포함한 하체를 가진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다. 거기에 이 주술사의 동작은 마치 앞으로 구부려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이 그림은 왜 그린 것일까? 「주술사」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어떤 원시사회의 주술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까? 주술의식을 보면 주술사가 동물의 가면을 쓰고 몸에 온갖 치장을 하고 춤을 추며 의식을 진행한다. 여러 가지 주문도 외우고 노래하며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하나의 의식을 통해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그들의 원시종교에 잠시 도피하는 것이 주술의식이다.

「주술사」는 이렇게 자신들의 주술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현명한 지도자가 자신의 후세에게 사냥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지금도 사냥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냥하고자 하는 동물의 특성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그 특성을 파악하여 여러 가지 사냥 도구를 준비하고 사냥에 나선다.

「주술사」는 책이나 구전과 같은 언어로 사냥법을 모두 전달할 수 없었던, 언어가 덜 발달한 시기에 지도자가 터득한 사냥법을 전달할 목적으로 이미지를 활용해 그린 벽화다. 이 벽화를 지도자가 직접 그렸을 수도 있고, 누군가 지도자를 대신해 그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냥하기 위해서는 사냥하고자 하는 그 동물이 되어 사냥감을 이해하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사냥하고자 하는 동물을 정확히 이해해야 그 동물을 사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술사」를 그린 지도자, 혹은 「주술사」를 그리도록 지시한 지도자는 무척이나 후손을 사랑한 현명한 지도자였을 것이다. 자신이 배운 가장 놀라운 지식을 후손에게 전달할 방법으로 이미지를 선택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매일 벽화 앞에 후손을 모아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생각해 보라. 이보다 더 현명한 스승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비극적으로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시간이 흘러 후손들이 이 그림을 그저 주술의식의 한 장면으로 생각하고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림을 따라 춤이나 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KakaoTalk_20161004_120010202.jpg?type=w1200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사랑'은 시계 초침의 움직임으로 표현된 부호로서의 문자 '언어'다.


이 세계는 나와,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언어와 이미지를 쏟아낸 결과다. 새로운 소설(언어, 혹은 이미지), 새로운 건축물(이미지), 새로운 사상(언어), 새로운 자동차(이미지), 새로운 요리(이미지)나 요리법(언어)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에 담긴 언어와 이미지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언어와 이미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언어와 이미지를 끝없이 키워야 하는 이유다. 또한 우리는 이 언어와 이미지로 나의 세계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다. 언어와 이미지의 크기는 생각의 크기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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