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

본질은 창조성에 이르게 한다.

by 더굿북

본질(本質, Essentia)은 ‘그 사물을 그 자체이게끔 하는 성질이며, 현상을 성립시키는 성질’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한 근원적인 성질이나 존재의 방법 또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에서 본질이 제거되면 그 사물은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거나 다르게 변형된다. 그래서 특정한 성질을 제거하더라도 존재가 변하지 않는, 존재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특성인 철학적 우유성(偶有性, Accident)과는 구별된다. 또한, 속성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양태(樣態, Modus)와도 구별된다.


본질은 고대 서양철학으로부터 탐구되어온 핵심적인 주제이다. 플라톤(Plato, B.C. 427~B.C. 347)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B.C. 322)는 현실계와 본질을 분리하여 규명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플라톤은 본질을 변화하는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이데아(Idea)의 세계로 규명하려 하였다. 이들에게 본질은 보이는 대상이 아닌 형이상학적 인식의 대상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귀납법으로 주변의 요소들을 제거하여 본질을 탐구했으며,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관찰이나 분석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칸트는 본질과 속성을 구분해 속성을 ‘본질의 논리적 이유’라고 구분했다.

하지만 나는 철학적 탐구대상으로서의 본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칸트가 구분해놓은 본질과 속성조차도 어떤 경우에는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창조적 탐구로서의 본질’에 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가 본질을 최종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관한 이해를 통해 창조적 사고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본질이든 ‘창조적 탐구’의 과정으로서의 본질이든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본질적 특성들과 섞여 존재하는 것이 본질이고,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속성으로 본질을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질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한다면 새로운 속성을 가진 본질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본질의 탐구과정은 어렵다.

원을 한번 생각해 보자. 원은 실재하는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작은 원에서부터 지름이 더 큰 원까지 수많은 원이 존재한다. 물론 관념의 세계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원도 있다. 예를 들어, 지름이 지구처럼 큰 원을 당장 실재하는 원으로 만들 수 없는 것처럼 관념에만 존재하는 원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의 본질은 무엇인가? 원은 ‘이차원의 평면에서 한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다. 다양한 속성도 있다. 원의 한 점에서 중심점을 지나 반대편 점에 이르는 직선인 지름의 길이가 어떤 경우에도 항상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KakaoTalk_20161007_095713911.jpg?type=w1200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그런데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원처럼 간단하게 본질을 찾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 검증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는 검증되지 않은 것조차 본질이라고 믿는다. 그러다가 가끔 놀라운 사람들에 의해 새롭고도 놀라운 본질을 알게 되고 실제로 놀라게 되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샘(1917)」과 같은 작품이 그런 것이다.

20세기를 바꾼 가장 위대한 작품 마르셀 뒤샹의 「샘」은 무엇을 보여줄까? 「샘」은 ‘레디메이드(旣成品, Ready-made)’가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 장소에 따른 본질의 변화, 참다운 예술의 정의에 관해 생각하게 하였다. 「샘」이 미국 독립예술가협회가 주최하는 앙데팡당전에 출품되었을 때, 이 소변기를 좌대에 올려 작품으로 변신시킨 순간, 우리는 이것을 더는 ‘소변기’라고 부르지 않았다. ‘본질’을 논하기 이전에 이 물건의 용도조차도 더는 소변기가 아닌 이상한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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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 본질조차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변기라는 본질적 특성은 마르셀 뒤샹이 좌대에 올려 작품으로 사인하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작품 「샘」은 예술작품으로서의 본질, 특히 예술의 경계를 기성품으로까지 확장한 최고의 작품이라는 더 놀라운 ‘본질’을 깨닫게 해주었다.

일반 대중들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샘」과 같은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과연 어땠을까? 마르셀 뒤샹은 당시까지의 ‘예술’의 본질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버린 것인데, 어떻게 그들이 수천 년 동안 믿어온 예술에 대한 본질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본질은 그것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본질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황당한 것에서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그 본질을 받아들인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윌든(Walden)의 오두막에 가기 전에 이미 ‘인생의 본질’에 대해 깨달았는지 모른다.

“내가 숲에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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