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목적을 이해하라
생각을 만들어내는 자극으로서의 감각, 경험과 학습을 통해 변화하는 이성과 감성, 생각의 도구로서의 언어와 이미지는 항상 새로움을 찾는다고 했다. 감각기관은 육체의 형태로 존재함으로 인해 모든 것을 육체의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항상 새로운 감각을 좋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새롭지 않은 감각에 대해서는 둔감해진다. 예를 들어, 목을 조이는 넥타이가 답답하다고 느끼지만 몇 초만 지나면 넥타이를 맨 사실조차 느끼기 어렵다. 이는 자극으로서의 감각, 그러니까 입력이 부실해진다는 의미다. 그래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들은 항상 감각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래야 더 예리하게 세상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활동을 학습과 경험을 통해 채운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함으로써 더 새로운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재료와 논리를 축적하는 것이다. 감성은 어떤가? 감성도 감각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이성에 쌓이는 학습과 경험을 관찰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움을 추구한다. 언어와 이미지조차도 더 넓은 생각의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기 위해 새로워지고 커지고 깊어지고자 한다.
이런 모든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뇌가 새로움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생긴다. 육체가 안전하고 덜 소모적인 데서 행복을 찾는 것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그래서 대부분은 육체의 행복론과 뇌의 행복론이 대립한다. 육체를 보자. 육체는 현재를 판단 기준으로 둔다. 이것이 현재 자신의 생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것이 현재의 육체적 만족에 필요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반면 뇌는 좀 더 먼 미래를 판단 기준으로 둔다. 뇌는 장기적인 생존과 미래의 행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육체의 판단 기준이 뇌의 판단 기준보다 항상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현재의 생존이 문제가 된 경우는 육체의 판단이 옳을 확률이 높다.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과정에 몸이 아파 공부를 지속하는 것이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참고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공부를 중단하고 몸을 우선 회복하는 것이 옳은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생존의 문제와 관계가 깊을수록 육체의 판단인 후자가 옳을 것이다.
그런데 육체의 판단 기준을 계속 적용하면 새로운 소재를 찾는 감각 능력, 새로움을 축적하는 학습능력, 직관적 해석과 감성을 만들어내는 융합 능력이 사그라든다. 이것은 뇌가 더는 새로움을 찾을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다. 육체에 지배당하는 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생물들, 즉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가 추구하는 생존과 무엇이 다른가?
뇌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는 인간이 육체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는 다른 생명체와 차별화되는 이유는, 우리 모두 인간으로 같이 존재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 가치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뇌의 이상적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냥 존재하거나 그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만드는, 그야말로 나를 새롭게 창조하는 이상적 목표 말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많은 사람과 같거나 비슷한 내가 아니라 그들과는 확연히 다른 나만의 색깔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색깔을 가진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무엇이 될까? 플라톤의 ‘본질’에 관한 탐구는 실제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이상적 세계인 이데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플라톤만의 철학적 색깔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플라톤의 색깔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약간 다른 색을 입혔다. ‘본질’은 플라톤의 생각처럼 이원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 편재되어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현실 세계를 통해서만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피스트(Sophist)들은 인식하는 사람의 다른 여러 가지 척도에 따라 본질이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자신들의 색깔을 주장했다. 이렇게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시작된 플라톤의 색깔은 또 다른 색깔을 촉발하는 촉매가 되어 주었다.
플라톤의 색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색깔에 녹아들어 다른 색깔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어떤 이들은 이 색깔을 보고 전혀 다른 자신만의 색깔로 응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색깔이 되어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색깔이 물들기도 한다. 그것이 철학이든, 조각이든, 그림이든, 작곡이든, 수학이든, 일상에서 내가 일하는 방식이든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것만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과연 나는 무슨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색깔을 만들고 있기는 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