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는 법으로 게임하면 지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잘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는 보편적으로 잘 배우는 방법, 그러니까 ‘누구나 공부를 잘하는 보편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해가 생길 수 있는데, ‘주변에 널린 공부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오해가 그것이다.
이 연재와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강조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저 남들이 만든 것을 ‘외우는 법’을 나는 ‘공부법’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연재를 여기까지 읽은 분이나 <천재들의 공부법>을 읽은 독자 대부분은 이 말을 명확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왜 공부에 소질이 없을까?’라고 느낀 사람 대부분은 ‘나는 왜 잘 외우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공부는 절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외우는 게임을 한다면 그저 아이큐(IQ, Intelligence Quotient)가 높다거나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에게 지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공부는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꿈을 이루는 것이지,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진짜 공부를 말한다.
내가 쓴 <천재들의 공부법>이나 <브릴리언트>를 검색해서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 ‘이 책은 공부법이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실제 공부법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은 거의 없다.’는 반응과 ‘공부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현재 내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반응이다. 불행하게도, 그토록 책에서 강조한 내용을 이해한 후자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
다시 공부로 돌아가자. 실제로 공부는 개인마다 현재의 자신을 형성하기까지 축적한 학습과 경험의 결과가 다르고, 관심사에도 편차가 존재해서 보편적 공부법을 적용할 수는 없다. 심지어 공부를 연구했다는 사람들이나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부법인 ‘외우는 법’조차도 보편적인 것은 없다. 운이 좋다면 자신에게 좀 더 잘 맞는 ‘외우는 법’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찾았더라도 각각의 지식을 자신에 맞추어 새롭게 다듬지 않는다면 지속해서 적용하기 어렵다.
이런 개인차 이외에도 학습의 재료를 전달하는 입력으로서의 감각 차이가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천재들이라고 명명한 ‘잘 배우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 특징을 먼저 배워 익힌다면 잘 배우는 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 특징 중 첫째는 ‘궁금증’, 다르게 표현하면 ‘호기심’이다. 이 궁금증으로 인해 자신이 궁금한 바를 누군가에게 묻거나 찾는다. 누군가에게 대답을 들을 수 없거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와 관련된 주제에 집중해서 찾는다. 그 방법이 웹 사이트건 도서관이건 아니면 또 다른 선생이나 친구이건 자신만의 연구이건 그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세이공청(洗耳恭聽)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원래 고사와는 반대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데, 고사는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에 나온다. 중국 전설에 따르면 요(堯)나라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왕위를 이어받을 것을 제안하였으나 허유는 이를 거절하고 기산으로 들어갔다. 임금은 다시 구주(九州)를 다스려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허유는 영수강(穎水江)에서 귀를 씻었다고 한다.
이때 그의 친구인 소부(巢父)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고 영수강에 왔는데, 왜 귀를 씻고 있는지 물었다. 허유는 친구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깨끗하지 않은 말을 들었으니 어찌 귀를 씻지 않겠는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소부는 “깨끗하지 않은 말을 들어 더럽혀진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어찌 송아지에게 먹이겠는가?”하고 말하며 송아지를 끌고 가버렸다고 한다.
세이공청(洗耳恭聽)은 이 고사와 관계되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구전되어 ‘귀를 씻고 공손한 마음으로 듣는다.’는 의미가 되었다. 이것이 학습의 첫 번째 궁금증의 해결방법이다. 이렇게 귀를 씻고 공손한 마음으로 들을 정도로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면 어찌 공부를 잘하지 못하겠는가? 그저 ‘남들이 만든 것을 얼마나 잘, 그리고 얼마나 빨리 외울 수 있는가?’ 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고사의 허유처럼 그럴듯하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일관되게 이런 특징을 지녔다.
두 번째는 ‘지식을 연결해 이야기에 담는 기술’을 가졌다. <천재들의 공부법> 본문에서 애플의 최연소 팀장이었던 제임스 바크의 학습을 설명할 때도 강조된 말이지만, 이야기와 함께 지식을 습득하면 주변 지식까지 한꺼번에 엮여 학습되는 학습 증강 효과가 발휘된다. (‘01. 깊고 연결된 공부의 기술’을 참고하라.) 단순하게 단어나 사건 하나를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잘 이해되고, ‘외우는 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억을 재생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이것이 ‘연결된 공부’를 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깊이를 만드는 것은 호기심의 깊이이고 개인의 능력이다.
마지막은 나를 항상 놀라게 해줄 ‘친구’를 곁에 두는 일이다. 여기에서 친구는 또래를 의미하는 친구가 아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항상 지식을 나누고 검증해주고 자기 의견을 나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해줄 그런 친구를 의미한다. 이런 친구와 토론하는 데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지적인 고민을 항상 같이 나눌 수 있다.
테슬라모터스(Tesla Motors), 스페이스엑스(Space X)의 CEO인 일론 머스크(Elon Musk)도 <천재들의 공부법>에서 강조한 두 가지 포인트를 크리스 앤더슨과의 TED 대담(2013.02)에서 말했다. 하나는 자신이 궁금한 것을 ‘유추’해서 생각하지 않고 근본적인 것까지 확인하고 해결하는 ‘물리학적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깊고 연결된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TED에서 일론 머스크를 검색하거나 아래 링크를 연결해서 꼭 확인하기 바란다.
http://www.ted.com/talks/elon_musk_the_mind_behind_tesla_spacex_solarcity
다른 하나는 이것이 실제로 그런 것인지, 자기가 한 공부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가정으로 똑똑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는다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이들을 ‘진심으로 조언하는 똑똑한 친구들’이라고 했다. 이런 친구가 여러분에게는 몇이나 있는가? 나는 이런 친구가 셋이면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내가 그들에게도 같은 존재가 되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친구는 많기도 어렵고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심 어린 동료애를 바탕으로 얼마나 진지하게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가이다.
이 외에 자기가 이해하는 언어보다 이미지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면, 이미지에 관한 학습을 더 열심히 할 것도 권하고 싶다. 21세기에는 생산되는 제품부터 심지어 지식에 이르기까지 감성적 메시지가 무척 중요시된다. 그래서 이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내가 만들어가는 세계에도 이런 방식으로 메시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색, 디자인, 그래픽,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에 관련된 능력을 키우는 일은 새로운 경쟁력 하나를 더 확보하는 길이자 새로운 세계에 더 잘 들어가는 방법이다.
창조적 사고와 관련하여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젊어서 그렇게 창조적이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고집스럽게 변했을까?’ 하는 질문과 이에 대한 해답을 잘 기억해야 한다. (‘15. 왜 나이는 공부를 죽음으로 몰고 갈까?’를 참고하라.) 고집스러워졌다는 것은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고 잘 듣지 않는 것이고,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입력이 들어올 방법이 사라진다는 것이고, 새로운 입력이 사라진다는 것은 새롭게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된다. 결국, 고집스러운 사람은 새로운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이제 이런 사람에게서 창조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
학습과 경험에 익숙한 잘 배우는 사람일지라도 감각기관의 노화는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심지어는 뇌, 즉 이성과 감성도 반응속도가 떨어지면서 노화한다. 언어와 이미지도 감각기관과 뇌의 노화에 따라 같이 쇠락한다. 나이를 먹으면 자주 쓰던 단어 하나가 생각나지 않아 멈칫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노화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적이다. 외부 세계는 새로운 세대에 의해 더 빠른 속도로 엄청난 변화를 거듭하는데, 나이를 먹는 개인의 내부 세계는 정체하거나 퇴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엄청난 노력의 산물인 학습과 경험을 통해 사회적 성취가 컸던 사람은 자신의 뇌에 대한 믿음이 크다. 특히 이성에 대한 믿음은 누구보다도 강렬하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이 ‘고집스러움’이다. 어쩌면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배움의 길은 힘든 길이고 끝이 없는 길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가지 않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왕 배낭을 메고 인생이라는 배움의 길을 나섰다면, 목적지인 죽음의 문을 저 멀리에 둔 채 멈춰 서지 말고 용감하게 끝까지 완주해보는 것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