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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7. 2016

01. 밀라노 대성당 재건축 계획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흰색 대리석으로 건설된 밀라노 대성당은 밀라노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큰돈을 들였지만 쓸모없는 대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은 1386년에 짓기 시작해서 여러 번 보수했지만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고 프랑스와 독일 대가들이 새로운 안을 제시했지만 비판의 소리가 높아 결국 이탈리아인의 손으로 완성시키기로 했다. 혼성물이 되어버린 이 건물을 부분적으로 수정해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성당 외관은 아예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꼭대기에 임시로 올려놓은 돔은 무너질 지경이었다. 따라서 이를 부수고 좌우익부들이 만나는 곳에 우아하고 단단한 티부리오를 올려놓을 계획이었다.

루도비코는 알베르티의 제자 루카 판첼리에게 자문을 맡겼다. 판첼리는 대성당의 기초가 탄탄하지 못해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고 말하며 네 개의 가는 기둥들과 균형을 맞춰 지상으로부터 55m에 이르는 높이의 구조물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밀라노 대성당 재건축을 위한 건축가들의 공모가 열렸다. 레오나르도 외에도 브라만테, 프란체스코 마르티니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많은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레오나르도가 대성당 건축위원회에 제출한 초안이 현존하는데, 그는 “병든 대성당”에 “의사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적었다. 이 안건에서는 자신이 문제점을 완전히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는 의사 건축가로서 티부리오를 제작할 수 있는 적임자임을 은근히 내세웠다. 

나의 모델에는 문제의 건물에 적절한 좌우대칭, 조화, 일치함이 있으며 … 어떤 열정으로도 여러분은 영향을 받지 않게 되고 올바른 건물의 규칙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나눠진 부분들의 수와 본질을 설명해주는 모델들 가운데서 나를 선택하든지 나보다 나은 것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당 재건축에 참가한 건축가들은 1488년 혹은 1489년에 자신들의 모델을 응모했다. 1490년 4월 13일 최종 결정자 발표가 있었으며 밀라노 건축가인 조반니 아마데오와 지안 돌체부오노가 뽑혔다. 두 사람은 5월 31일에 만나 서로의 모델에 대해 의논했지만 서로 자신의 모델을 고집하는 바람에 절충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브라만테는 두 사람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각 모델에서 조금씩 딴” 절충적 모델을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루도비코는 프란체스코 마르티니와 조반니 아마데오, 그리고 레오나르도를 파비아로 불러 대성당에 관한 세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세 사람은 6월 27일 루도비코, 밀라노 대주교, 건축위원회 앞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발표했다. 9월 11일 대주교는 티부리오의 초석을 놓았고 이것은 1500년에야 완성되었다. 건축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 레오나르도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6월 초 더 이상 응모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가 흥미를 잃게 된 이유는 이 성당이 모든 응모자들의 장점을 취한 합성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6월 27일 레오나르도는 어떤 모델이나 계획안도 제출하지 않았지만, 자문역을 담당하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한 것 같다. 공작으로부터 건축 책임을 맡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는 파비아로 가는 도중 레오나르도와 최종 디자인에 관해 의논했다. 

레오나르도는 석조 건축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디자인한 건축물을 만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동안 쉬지 않고 건축에 관한 책을 읽고 나름대로의 공부를 해왔다. 베로키오가 피렌체 대성당 꼭대기에 올려놓을 구체를 구상할 때부터 그는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브루넬레스키를 연구했으며 새로운 건축물을 직접 그리면서 어떠한 구조로 건립되었는지 분석했다. 

레오나르도, <교회 중심을 위한 연구>


레오나르도의 해부학적 드로잉이 이 시기에 시작된 것도 흥미롭다. 물론 일찍부터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현존하는 스케치들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들로 건축물에 대한 연구가 인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는 “인간이 세계의 모델이다”라고 했다.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에 관하여(De Architectura)』에서 인체가 정사각형과 원형 위에 만들어졌다고 적었는데,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적 인체 비례’로 알려진 다양한 포즈를 취한 남자 누드를 원형과 사각형 안에 그렸다. 그는 친구 루카 파치올리에게 보낸 편지에 ‘원형 인간(De Divina Proportione)’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고대인들은 인체에 대해 엄격한 비례를 생각해내고 이를 정성 들여 작품에 사용하였으며 특히 성스러운 신전에 이러한 비례를 적용시켰네. 여기서 그들은 어떤 프로젝트로도 할 수 없는 두 개의 원리가 만들어지는 도형을 발견했는데, 완전한 원형과 정사각형이라네.

이 시기에 그는 온갖 종류의 건물들을 바닥 평면의 반지름 주변으로 모든 부분들이 집중되는 디자인을 고안했으며 모두 “원형 인간”을 상기시키는 것들이다. 그는 인체의 기하를 우주의 일체와 완전함에 적용하며 점차 대지 자체가 인간의 이미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대지는 성장하는 삶을 갖고 있는데 몸은 흙이고, 뼈는 산맥을 형성하는 바위들의 배열과 집합이며, 연골은 석회암이고, 피는 흐르는 강물이다.

기계적인 인간에 대한 그의 개념은 공학적 프로젝트에 적용되었고 또한 공학적 프로젝트는 기계적 인간에 적용되기도 했다. 그는 해부학을 지리학자의 자세로 바라보면서 식물학을 부인과 의사의 말투로 설명했다.

소우주에 대한 우주구조론은 열두 개의 완전한 모양들 속에서 드러나며 프톨레마이오스(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수학자, 지리학자)의 우주론을 따르는 듯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가 대지를 지방으로 나눈 것처럼 수족들로 나눠야 한다. 나는 대지의 기능들을 인체의 부분들로 설명하며 인간의 전체 형태와 실체, 그리고 모든 부분들의 운동을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인간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주께서 나로 하여금 인간의 본질과 관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레오나르도, <비트루비우스적 인체 비례>, 브라운 수채, 34.4×24.5cm


레오나르도의 이런 식의 분석은 지질학과 생리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면 강물이 산 위의 눈이 녹아서 흐르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잘못된 이해가 있지만 레오나르도를 포함해 15세기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객관성에 주안점을 둔 자연주의를 추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15세기의 과학적 훈련이 있었기에 이후 예술가들은 그들의 성과에 힘입은 것이다. 수학, 기하학, 광학, 기계학, 광선론, 색채론, 해부학, 생리학은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에게 기본 도구였으며 공간의 성격, 인체의 구조, 인체의 운동, 비례 등은 주요 관심사였다. 

1490년은 드물게 이탈리아 전체가 평화로운 때였으며 모든 공화국들이 정치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밀라노의 경우 전염병이 완전히 물러갔다. 예술은 다시 활기를 띠었지만 도덕적 부패는 날로 심해졌다. 마키아벨리에서 몽테스키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도덕주의자들은 시민들이 덧없이 행복을 누리던 이 시기가 도덕적으로는 부패했다고 적었다. 창고에는 곡물이 가득 찼고 밀라노의 문화센터인 파비아와 루도비코의 고향 비제바노에는 옛 건물들이 헐리고 커다란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정원들이 가꾸어지고 도로가 새롭게 포장되며 건물 외관은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레오나르도의 재능은 빛을 발했으며, 밀라노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와 브라만테의 이름이 공문서에도 자주 올랐다. 레오나르도는 파비아의 낡은 성당 산타 마리아 알라 페르티카를 새로 디자인했다.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마르티니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보다 열세 살 많은 그는 회화와 조각을 수학한 후 공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하수도와 우물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는 변속장치, 기어, 대포탄환 조속기, 대포, 추진력 있는 바퀴가 달린 자동 프로펠러 수송 수단, 배수펌프, 시계, 노 젓는 배, 물속에서 공격할 수 있는 잠수복 등을 고안했고 건축에 필요한 도구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원래 공학가라는 직업은 고대로부터 군사용 공격 혹은 방어 무기를 제작한 데서 비롯한 말이다. 로마의 시저 시대에 기록을 남긴 비트루비우스의 글을 보면 공학가들은 산업용 기계들, 제방, 물 조절기, 펌프, 우물, 운하, 수문, 물시계 등을 건립하거나 분쇄하는 기계는 물론 제분기, 교량, 사원, 굴착기, 기중기, 승강기, 공성망치(battering ram), 투석기, 그리고 그 외의 공격용 무기들을 제작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기계’와 ‘빌딩’이란 말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고 공학-건축가(engineer-architect)란 명칭도 자연스러웠다. 

레오나르도는 공작의 주문을 받아 소규모 기계들을 많이 제작했으며 그중에는 회전하는 분수, 커튼을 올리고 내리는 기계도 포함된다. 그 후 올리브를 짜는 장치, 문을 자동으로 닫히게 하는 장치, 가지 촛대, 아주 밝은 빛을 내는 탁상 램프, 접이식 가구, 대형 상자를 위한 자물쇠, 거울(특히 팔각형 거울로 그 안에 서면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반사된다),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는 팔걸이 의자, 목욕탕과 세탁소, 도랑을 청소하는 기계 등을 디자인했다.

레오나르도, <도랑을 청소하는 기계>


이런 디자인들은 독창적이었으며 매우 훌륭한 것들로 인정을 받아 그는 궁정에서 벌어지는 만찬에 종종 초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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