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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7. 2016

03. 새로운 생명

<112일간의 엄마>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는 아주 대단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여유가 달랐다. 같은 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안정감이 들었다. 불안감만 컸던 캐스터 일도 그랬다. 물론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순 없었지만 조금은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오 덕분이다.


결혼한 지 1년쯤 됐을 때였지 싶다. 그날은 「ten.」 방송이 없는 토요일이어서 나는 오전 내내 게으름을 피우며 잠만 잤다. 몽롱한 가운데 ‘나오는 어디 나갔나 보네?’ 했던 기억이 난다. 잠기운에 멍해 있는 참에 나오가 돌아왔다.

“어디 갔었어?”
“병원에.”
“병원에는 왜?”
“아기가 생겼대.”
“응?”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으나, 곧 잠이 확 달아나면서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고마워.”
“응.”

나는 이때 처음으로 나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던 것 같다. 내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보다 나오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뭐랄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인 것만 같아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임신 3개월은 아직 안정기에 접어들지 않은 단계이기 때문에 미리부터 여기저기 알려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곧장 우리 부모님에게 전화로 알렸다.

“나오도 얼른 부모님에게 전화해.”
나오에게도 그렇게 재촉했다.

“힘내자.”
“응.”

나는 나 자신을 다독이듯 “힘내자!”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캐스터와 스타일리스트. 나오는 업무에서도 항상 나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다만 사생활에서는 조금 변화가 생겼다. 당연히 마냥 내 위주로만 살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오가 염려되어 나오 대신 우유며 달걀 등을 사러 슈퍼에도 가고, 함께 장을 보는 날엔 무거운 짐을 들리지 않으려 했다.

결혼하고 1년 만에 임신. 그림으로 그린 듯한 행복이다. 나는 행복 속에 잠겨 있었다. 나오도 그랬을 것이다. 딱히 뭔가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미소가, 그리고 행복한 공기가 끊임없이 우리 두 사람을 감싸주었다. 나오를 지키자. 그 마음이 강해졌다.

임산부에게 이 음식이 좋다더라 하면 그 식자재를 사러 가고, 태교에 좋다는 음반도 사들였다. 둘 다 우리 아이가 태어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매일같이 나오의 배에 손을 갖다 대고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우리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의 서른여덟 번째 생일. 나오는 이런 축하 카드를 주었다. 

올 한 해도 즐거운 일이 잔뜩 기다리고 있네요.
레이디짱(키우는 반려견)도 있고, 배 속의 아기도 있고, 지켜야 할 보물이 한가득입니다! 이대로 쭉쭉 달려주세요! 나는 언제까지고 함께할게요. 앞으로도 웃는 얼굴로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요. 

미래의 아빠에게, 미래의 엄마가 

나는 이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었고 나오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오의 배 속에는 우리의 ‘보물’이 있다. 우리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이어주는 보물.


가슴에 작은 멍울이

그것은 아주 작은 ‘멍울’이었다.

정기적인 산전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아내가 주치의인 니시가와 선생님에게 “왼쪽 가슴 아래 겨드랑이 쪽에 작은 멍울이 잡히는데요” 하고 상담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다지 신경 쓰일 만한 멍울은 아니었다. 아내도 ‘걱정돼서…….’라기보다는 만약을 대비하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상담이었다.

“임신하면 유선 조직이 발달하면서 멍울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검사를 받아봅시다.”

이때는 주치의도 ‘만일을 위해 검사한다.’는 정도로 대응했다. 아내도 나도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

검사도 집 근처 병원에서 받기로 하고, 장모님에게 같이 가달라고 부탁드렸다. “검사 결과 나오면 전화 주고” 하고는 나도 평소대로 회사에 나갔다.

검사는 오전 중에 끝난다고 했다. 그런데 좀처럼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응?’ 나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오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받질 않았다. 몇십 번을 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멘트만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메시지도 여러 차례 보냈지만 아예 읽지 않을뿐더러 전화도 오지 않았다.

4시 47분부터는 프로그램 본방, 생방송이 시작된다.

‘환자가 많아서 검사가 늦어지나?’

그렇게 몇 번이고 나 자신을 다독였지만 불길한 예감이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본방 전에 켄 씨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나오의 배려였단다. 하지만 방송 1부와 2부 사이에도 내가 전화를 하자, 보다 못한 장모님이 “전화 받는 게 낫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보세요.”

간신히 나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우선 안심이 됐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있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어떻게 됐어?”
“응, ……악성이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겠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악성이라면, 암이란 거야? 유방암이라고?”
“응, 그런가 봐.”

그 후 나머지 방송을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방송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혼란 속에 있었다. 악성, 유방암……. 그 말만 내 머릿속을 뒤덮었다. 나는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후회가 솟구쳤다. 오늘 같은 날, 왜 병원에 같이 가주지 못했을까.

휴대전화에 나오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런 나여서 미안해요.’

미안해, 나오. 사과는 내가 해야지. 내가 지켜줄게.
나는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괜찮아, 괜찮아.”

주문처럼 되뇌었다.

“괜찮아, 절대 괜찮아. 같이 힘내자.”
“응.”

나오는 씩씩하게도 내게 웃는 얼굴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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