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정부의 배려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963년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이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백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뇨리의 일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성모 엘리사베타의 초상이다. 조콘도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으로, 1495년 몬나 리(Monna Lisa)라는 과부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고 1499년에 죽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의미가 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503~6년 동안 여러 차례 몬나 리자를 자신의 작업장으로 불러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표현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으로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 넣었다. 그녀는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입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의상의 우미한 주름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 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스치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이렇게 묘사했다.
물 위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얼굴의 부드러운 표면 위를 스쳐 가는 움직임이다. 빛과 그림자가 벌이는 유희와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는 속삭이는 대화다.
뵐플린은 이런 개념과 표현이 16세기에 생겨난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당시에는 미소가 유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는 눈두덩의 부풀어 오른 부분이 높은 앞이마로 이어졌음을 지적하면서, 몬나 리자에게 눈썹이 없는 것은 당시에는 넓은 이마를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이에 <모나리자>의 눈썹과 이마 윗부분의 머리가 밀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뵐플린은 몬나 리자의 취향이 철저히 15세기적임을 강조하지만, 바로 직후 유행이 달라졌음을 지적한다. 그는 마드리드에 있는 <모나리자> 복제판에 그려진 눈썹을 예로 들어 이마는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편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졌다고 설명했다.
레오나르도는 과거 화가들과는 달리 흉상이 아닌 반신상으로 그렸다. 약간 옆으로 앉은 모델의 상반신을 반쯤 틀고 얼굴은 거의 정면을 바라보게 묘사했다. 왼팔은 안락의자 팔걸이에 올려져 있고 오른팔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뻗어 나오면서 오른손이 왼손 위에 살며시 포개졌다. 편안한 동작으로 보아 모델의 성격이 차분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입체감을 회화의 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아주 섬세하게 튀어나오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조콘도는 아내의 웃는 모습을 벽에 걸어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모나리자>를 구입하지 않았고 한동안 레오나르도가 소장해야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나 <라 조콘다>로 알려졌다. 여러 해가 지나고 프랑스 왕 프란체스코 1세가 4천 크라운을 주고 구입하여 퐁텐블루 궁전에 걸었다. 이후 이 초상화는 프랑스어로 <라 조콘드>로 불리웠고 영어로는 <모나리자>로 알려졌다.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미술가 열전』을 쓸 당시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고,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사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작품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로렌초의 막내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좋아한 여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하기 몇 달 전 아라공의 추기경이 그림의 여인을 피렌체에서 보았다면서 줄리아노의 여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름은 파시피카 브란다노가 된다. 그 밖에도 이 여인에 관한 설이 분분해서 이제는 누가 과연 실제 인물인지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그림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모나리자>로 불리고 있다.
바사리는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작품을 구입하지 않은 이유를 4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 루브르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사리의 말대로 당시 그것이 미완성이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프랑스로 가지고 가서 완성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줄리아노가 레오나르도에게 <누드 모나리자>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이 대부분 수난을 겪었듯이 <모나리자>도 수세기 동안 수난을 겪었다. 패널 양쪽이 7cm 가량 잘려나갔으며 그 위에 덧칠되었고 얼굴 부분에는 연한 황록색 유약이 칠해졌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예술가가 이를 모티프로 갖가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레오나르도에게 존경을 표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자 몽롱상태 #1>, 1985 _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모나리자>는 지워지고 거꾸로 구성한 동일한 이미지와 오버랩되어 새로운 회화의 언어로 변형되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무제>, 1980 _라우센버그는 <모나리자>를 의자 등받침대로 사용함으로써 전통미를 부정하고 있다. <모나리자>를 부정해야만 새로운 미술이 가능했던 걸로 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작품이 규범으로 존재해왔는지 알 수 있다.
마르셀 뒤샹, <L.H.O.O.Q.>, 1964 _뒤샹은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엽서로 프린트한 것을 사서 연필로 염소수염을 그려넣었다.
앤디 워홀, <모나리자>, 1963 _워홀은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한 ‘변용’을 시도하면서 여러 개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적 이미지를 대중적 이미지로 격하시켰다. 반복과 변용은 그의 주요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