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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8. 2016

01. 구글은 어떻게 움직이는 미래를 잡나?

<천재의 생각법>

마이크로소프트를 따라잡은 구글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는 1998년 스티브 발머에게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그때 인터뷰에서 “경쟁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어딘가의 차고에서 작은 회사를 세우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젊은이들이다.”
   
바로 그해 1998년 가을, 스탠퍼드대학 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구글이라는 작은 회사를 창업했다. 둘은 학교 근처 멘로파크에 있는 한 주택의 차고가 있는 창고를 빌렸다. 앞길이 창창했던 그들은 세계 최고의 검색 엔진을 만들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탠퍼드대학을 떠난 것이다. 실리콘 밸리의 투자자이자 당시 시스코시스템즈의 부사장이던 앤디 벡톨샤임에게 받은 10만 달러를 들고서.
     
그리고 2016년 현재 그들이 만든 구글은 기업가치 세계 1위 기업이 되었다. 애플과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를 따라잡은 지는 이미 한참 되었다. 빌 게이츠의 말이 현실이 되는 데 채 20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래리세르게이 = 래리 페이지 + 세르게이 브린

“래리세르게이!”
   
똑 닮은 두 사람이 뒤돌아본다. 그들은 20년 후 세계 제일의 기업 구글을 만드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다. 그들은 ‘페이지랭크’라는 독자적인 검색 알고리즘을 개발해 구글을 설립하고 빠른 속도로 검색 시장을 장악했다. 현재 구글은 전 세계 60여 개 나라에 지사를 두고, 전 세계 검색 시장의 70% 이상을 지배하고 있다.
    

페이지랭크(PageRank), 어떤 사람이 얼마만큼 그 문서를 인용하였는지를 비교하여 문서의 중요도를 선별하는 방식



래리 페이지는 1973년 미국 미시간 주에서 태어났다. 래리 페이지가 8세 때 부모는 이혼했으나 부모의 역할 만큼은 열정적으로 했다. 아버지 칼 페이지는 미시간주립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였고, 마찬가지로 어머니 글로리아도 컴퓨터 교수였다. 컴퓨터를 전공한 부모 슬하에서 그 역시 컴퓨터 영재로 자랐다. 6세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때는 숙제를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해 제출하기도 했다. 래리 페이지는 그 학교 최초의 워드 프로세서 얼리어답터였다.
     
래리 페이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미시간대학교에 진학해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교수가 되고 싶었던 그는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스탠퍼드대학원에 진학하는데, 그곳에서 운명적인 파트너 세르게이 브린을 만난다.     


유대인 학대를 피해 소련에서 미국으로 온 브린의 가족

세르게이 브린은 1973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유대인 학대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온다. 그의 아버지 마이클 브린은 이렇게 말한다. “나 자신과 아들의 미래를 위해 소련을 떠났습니다.”
   
세르게이 브린의 부모 역시 전형적인 유대인 부모로 자식 교육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에 걸맞게 세르게이는 놀라운 학습 속도를 보이며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메릴랜드대학에 진학한다. 수학 영재 세르게이는 1993년에 수학과 컴퓨터공학 분야에서 우등생으로 학사학위를 땄다. 이후 컴퓨터공학 지원 장학금으로 스탠퍼드대학에 간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1995년 스탠퍼드대학교 학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다. 신입생인 래리 페이지의 캠퍼스 안내를 2년 선배인 세르게이 브린이 맡게 된 것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두 사람의 생각은 충돌했고 논쟁이 벌어졌다. 성격도 판이하였다. 브린은 합리적이며 문제 해결에 뛰어났고, 래리 페이지는 신중하고 내성적이었다. 친해질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둘은 뜻밖에 금방 가까워졌다. 서로가 ‘지적인 경쟁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기본 바탕은 유대인 방식의 가정환경이었다. 둘은 모두 질문과 토론에 익숙하고, 논리적인 공격과 방어에 능숙하도록 성장했다. 래리 페이지의 아버지인 칼의 동료가 이 사실을 대신 회고한다.
     
“래리는 모든 것에 대해 논쟁하고 싶어 했습니다. 래리는 아버지와 거의 모든 것에 관해 토론했습니다.”
   
래리 페이지와 브린은 아예 논쟁과 토론을 즐겼다. 이 ‘논쟁과 토론의 과정’은 두 사람이 더 깊게 ‘교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래리 페이지와 브린은 빌 게이츠의 기부로 세워진 ‘게이츠 빌딩’ 306호에 기숙하며 같이 살았다. 캠퍼스에서 같이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보고 친구들은 이 둘을 부를 때 마치 한 사람의 이름처럼, 운율을 넣어서 ‘래리세르게이’라고 불렀다.
     
래리세르게이는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쓸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부모님은 과학 기술 분야의 전문가였고,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열망을 공유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디지털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꿈을 꿨다. “일은 도전이어야 하고 도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가치를 추구하는 그들은 ‘사용자가 세상의 모든 정보를 공짜로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들은 2년 만에 놀라운 결과를 내놓는다. 그들은 1997년 스탠퍼드대 연구실에서 수학적 알고리즘을 활용한 혁신적 검색 엔진 ‘페이지랭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페이지랭크’는 사용자에게 중요한 순서대로 검색 결과를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이는 당시 최고의 검색 엔진으로 알려진 알타비스타나 야후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이 진척될수록 두 사람의 새로운 고민은 깊어졌다. 학자와 사업가 사이, 선택의 갈림길에 선 두 사람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담당 교수 제프리 울먼이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나?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와서 박사과정이나 마치면 되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기업가치 전 세계 1위로 올라선 구글

구글은 2015년 말 기준 전 세계 기업가치 1위로 올라섰다. 구글이 인터넷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사용자 우선’의 시스템이다. 『구글드』에서 저자 올레타(K.Auletta)는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알타비스타에서 ‘대학’을 검색하면 ‘대학’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텍스트를 수없이 보여준다.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링크를 사용하는지 평가하거나 가치의 순위를 매기지는 않았다. 같은 검색에서 구글은 사용자들의 ‘집단지성’에 의지하여 상위 10개 대학을 보여준다.”
   
이 책에 의하면 래리 페이지는 “시스템은 대체할 수 있지만, 사용자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같은 꿈을 꾸는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다. 두 사람이 끊임없는 논쟁으로 생산하는 창조적 스파크는 미래를 움직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이들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들은 하나같이 상식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것들이었다. 
     
구글은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2016년 올해 3월, 구글 자회사인 딥마인드(DeepMind)는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를 개발해서 우리나라의 바둑 천재 이세돌을 4:1의 성적으로 꺾기도 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래리 페이지는 자신의 목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임무는 세계의 정보를 조직화하여 전 인류가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래리 페이지는 ‘10배의 철학’을 제시한다. 구글의 어원인 ‘구골googol’은 원래 10의 100제곱을 뜻하는 수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10배의 철학’이란 ‘10% 향상하기보다 10배를 향상하라’는 것이다. 이는, ‘구글이 하는 일은 모두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것보다 10배 더 위대하고 더 나으며 더 빨라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생각이 제대로 이루어져 간다면 그들이 꿈꾸는 ‘디지털 유토피아’가 생각보다 빨리 우리 앞에 그 본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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