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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8. 2016

05. 식물인간, 산송장 그리고 윤리

<사이보그 시티즌>

린다 호글(Linda Hogle)의 대학원 과정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관찰하는 일과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미국과 독일을 오가며, 장기기증을 결정한 말기 환자들의 방에서 그들과 그들 장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관찰했다. 이것은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경험이었다. 환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간호사들은 용기를 내라며 그들을 위로하곤 했다. 

     
하지만 심장과 폐가 멈추자 모든 상황은 달라졌다. 조달 전문가들로 불리는 새로운 의료팀이 중환자실 의료팀을 대체했다. 그들은 특수장비들을 들여오고 장기 기증자로 신분이 바뀐 사망자의 얼굴과 성기를 천으로 덮는다. 이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의 몸을 상대로 작업한다. 만약 이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의료직원들은 기계들과 협의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사이보그는 ‘단순 사망’ 상태이다.


화학물질들과 기계들이 시체가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데, 물론 장기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뇌사 진단을 받게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수확을 시작한다. 물론 이 시점에서는 장기들을 살아 있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워진다. 이것이 ‘이중 사망’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계통이 무너지고 장기가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런 것들은 더는 거둘 수가 없으며, 이것은 곧 ‘삼중 사망’을 의미한다.
     
사이보그화는 죽음의 양상을 극단적으로 변모시키고, 전혀 새로운 의료윤리의 쟁점들을 양산했다. 환자에서 기증자 - 사이보그로 변신하고 그로 인해 결국 비인간화되는 과정, 차별화된 장기 수요의 관리 그리고 기증자 - 사이보그의 ‘부속품들’이 어떻게 새로운 사이보그의 씨앗이 되는지 등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가 이보다 더 모호했던 적은 없었다.
     
‘새로운’ 죽음을 다루는 뛰어난 논객 스튜어트 영너는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Some Must Die)〉라는 글에서 ‘재닛’이란 환자의 치료를 소개한다. 그녀가 임신 22주째에 접어들었을 때 자발성 신파열 뇌동맥류로 뇌혈관이 터졌다.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의사들은 그녀에게 뇌사 판정을 내렸지만, 그녀의 태아는 아직 살아 있었다. 병원은 우수 간호 인력을 선발해 출산이 가능할 때까지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돌보게 했다.
     
재닛은 법적으로 사망했지만, 간호사들은 그녀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고(이에 대한 반응으로 심장박동에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영혼’이 아직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녀가 살아 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손톱은 계속 자랐고, 그녀의 아기 역시 자랐다. 이런 경우처럼 건강한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탄생할 수 있다면,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영너는 일부 보건 전문가들이 ‘뇌사’라는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뇌의 죽음과 그냥 죽음 간에 차이가 있음을 내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말이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 재닛의 몸은 여러 기계 덕분에 죽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의 지능은 사라졌지만, 아마도 그녀의 영혼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이보그로서 그녀는 인간이라기에는 덜하고 죽었다고 치기에는 더 한 존재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만일 죽음을 맞이한다면 자신의 인간다움을 기꺼이 희생해서라도 재닛 같은 준생명의 상태로 남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의료기술 때문에 죽음이 불필요하게 지연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오리건 주와 네덜란드에서 제정된 ‘죽을 권리’에 대한 법률이 높은 지지를 얻은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이다.

죽음에는 세 가지 다른 정의가 있다. 심장과 폐가 정지했을 때, 뇌 전체가 활동을 멈추었을 때, 그리고 고차적인 뇌(Higher brain)가 활동을 중단했을 때이다. 장기기증을 촉구하는 추세는 사회를 더 진보적으로 몰아간다. 오늘날의 장기들은 ‘심장이 뛰지 않으나 다시 뛸지도 모를 송장들’에게서 거둬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기술을 이용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장기를 떼어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죽음의 정치학과 이식의 정치학이 밀접하게 뒤엉켜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이의 죽음이 다른 이의 생명을 결정한다. 죄수들이 장기를 기증하도록 해야 할까? 환자들이 자살을 선택하고 장기를 기증하도록 해야 할까? 사용 가능한 장기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의사들이 생명, 의식과 죽음 그리고 비인간의 정의들을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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