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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Aug 10. 2022

남편보다 자식보다 내가 먼저

내 친구 H이야기

"진영아. 잘 지내? 나 지금 한국이야. 방학이라 들어왔거든~"


5년 전 친구 H는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나갔다. ○○사 연구원이었던 내 친구는 아들의 영어공부와 해외 생활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의 해외지사 근무에 따른 높은 연봉을 위해 자기 커리어를 포기하고 떠난다고 했다.




 H와 나는 고등학교 1학년에 같은 반에서  만나 친해졌다. 키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형제관계 부모님의 직업 등등 가정환경까지도 비슷했다. 자연스럽게 친해진 우리는 늘 붙어 다녔다. 10시까지 야자를 하고 나면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걸어갔고 주말엔 도서관에서 만나 나란히 앉아 공부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세트로 자리를 맡아주곤 했다. 방학엔 같은 독서실에 다녔고, 공부도 하다가 아이스크림도 먹다가 수다도 떨다가 그랬다. 잘 통했고 많이 비슷했지만 H는 나보다는 덜 감성적이고 이성적이며 현실 감각이 뛰어난 친구였다. 문과 이과를 나눌 때 알아봤다.  이과를 선택해야 나중에 취직하기가 좋다는 선생님들의 말들, 문과는 할게 많이 없고 취직도 어렵다는 흔한 말들, 이과를 가는 것이 훨씬  장래에 유리하다는 은근 강요하는 주변의 이과 선호 분위기.  H는 이과로,  눈물 많고 지극히 감성적인 나는 당연히 문과를 선택했다. 내 인생에 이과적인 삶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이과적인 삶이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이과와 문과로 갈리면서 조금씩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 듯했다.



  H가  뭐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성실했고 똑똑했다. 공부도 잘했고 욕심도 많았다. 우린 비등비등하게 공부했지만 친구는 이과 나는 문과이니 우리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대학 갈 즈음 정말 문과는 그다지 선택지가 많지 않았고 나는 어릴 적부터 쭉  '중등교사'가 되는 정도의 꿈이 있었으니 과목만 선택해서 학과를 고르면 되는 상황이었다. H는 그 당시 나에겐 이름도 생소한 '신소재공학'이라는 걸 선택해서 공대 여자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전혀 다른 학과를 선택해서 대학에 진학했다. 전혀 다른 길을 가는 듯했지만 우리의 우정은 끈끈했고 단단했다.  스무 살 어설픈 연애에 실패해서 방황할 때 H에게 연락해서 하소연했고, 유난히  마음 둘 곳 없어 헤매는 나를 두고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H는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대학 4학년 즈음해서 만난 어느 날, 공부 욕심이 많았던 친구와 나는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까지  다니자고 맹세(?)를 했다. 신라의 두 화랑이 유교 경전을 학습할 것을 맹세하고 비석에 새겼다는 임신서기석처럼 비석에 새기지만 않았지 우리는 둘 다 진지하게 학업을 좀 더 연장하기로 다짐했다. 당장 졸업하기엔 두렵기도 했고, 2년을 더 다니면 뭔가가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린 둘 다 스물다섯에 석사를  하고 스물여섯 되는 해에  졸업을 했다. H는 본인의 지도교수님  추천으로 oo사의 연구원이 되었다. H는  스물여섯부터 잘 나가는 젊은 연구원이 되어  돈도 잘 벌었다. 대학 시절엔 연애도 잘 안 하더니 연구원이 된 이후로는  연봉이 높은 공사 출신의  남자들과 주로 소개팅을 했다. 연구소에 인맥들은 주로 그런 사람들을 소개해준다고 했다. 그중 연봉 높기로  유명한 공사에 다니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했다. 시댁은 같은 아파트 다른 라인이어서 살림은 시어머니가 거의 다해주고 하나 있는 아들도 시어머니가 다 돌봐준다고 했다. 집에서 밥도 거의 안 한다고 했다.  아침엔 시어머니가 국까지 끓여서 가지고 오면 그걸 가지고 자기랑 아들이 먹고, 자기는 출근하고 아들은 시어머니가 어린이집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때 남편과는 주말부부였다. 완벽한 커리어우먼이었다. 이보다 더 멋진 커리어우먼일 수가 없었다.

H는 내 마음 한편에 갈망하던 커리어우먼 & 워킹맘의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 나는 스물여섯에 다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어야 했고, 과외와 학원 강의를 알바로 병행하며  불안한 생활을 이어갔다. 시험에 낙방도 했고 H처럼 'OO사 연구원'이라는 그럴듯한 명함 한 장 없었다. 스물다섯에 만나 연애 5년을 한 사람과 서른에 결혼을 했다. 시댁은 홀시아버지에 가난했고 남편 역시 안정적이긴 하나 박봉의 공무원이었다.  아이를 돌봐줄 시댁도 없었고 내 직장도 없었다. H와 나는 극명하게 달라진 삶을 달리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나란히 공부하던 10대 시절엔 이렇게 다른 삶을 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비슷하게는 살 줄 알았다. 경제적으로든 직업적으로든 뭐로든.....



  친구지만,  부러움을 가득 느끼게 하는  H였다. 가끔 살짝은 배도 아팠을까? 그런데 크게 아픈 느낌은 없었고, 나도 H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H가 가진 것들을 가져보고도 싶었다.  6년 전쯤 H는 아주 좋은 차를 타고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좋은 차에 예쁜 옷까지 입고 온 완벽한 커리어우먼 & 워킹맘 포스로 아들 하나를 데리고 내가 사는 먼 광주까지 왔다.

"부럽다. H야. 나는 언제 그런 차도 타볼까? "

"야~~ 너도 더 일해서 바꾸면 되지~"

그리고는 소고기를 잔뜩 사서 나에게 쥐어주고 H는 갔다.

타는 차도 달랐고(그 당시 나는 소형 중고차를 타고 있었다),  고기 사는 종류와 스케일도 달랐다.



그러고 나서 친구는 남편을 따라 '아부다비'로 간다고  연락이 왔다. 거기가 디래? 아랍에미레이트의 수도라고 했다. 남편이 해외지사에서 근무를 하고 3년 이상을 근무하면 연봉을 꽤 많이 준다고 했다. 하나 있는 아들 외국 생활도 경험하고 영어공부도 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게다가 돈까지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 아.. 또 부럽다'

그러면 연구소는? 그만둔다고 했다. 10년 이상을 연구원으로 바친 삶은 그만두고 외국 생활을 선택해서 친구는 그렇게 아부다비로 떠났다. 간간히 카톡 프사에 올라오는 사진들로 H의 외국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의 여행지들, 아들의 외국학교 생활 모습들... 더없이 좋아 보였다.




5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H에게 연락이 왔다.

"진영아! 잘 지내. 나 한국이야! 지금 대전 시댁이야. 방학이라 들어왔어"

"응, 너무 오랜만이다......(중간 생략하고)...... 이제 조금 편안해. 많이 극복한 거 같아. 독서교실도 잘하고 있어. 경제적인 부분도 많이 극복했어. 애들도 잘 커. "

 늘 부럽기만 했던 내 친구 H에게 이제는 내가 조금은 안정감 있게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늘 방황과 불안을 토로하던 내가 27년 지기 친구에게 드디어 '안정'과 '편안함'을 이야기했다. 친구가 그랬다.

"잘했어. 진영아. 나 없는 동안  내 친구 잘 살았네~~~~"

그런데,  대화의 끝에 H가 그런다.

"너는 5년 동안  아주 멋있어졌는데,  나는 5년 동안 남편과 아들만 보면서 살았더니 내가 없어진 거 같아."

  내가 세상 제일 부러워하던 친구 H, 누구보다 당당했던 여자! H가 자기가 없어진 거 같다니!?



아무리 잘난 남편, 똑똑한 아들,  자식 공부가 중요하다 해도 내가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자의식이 무척 강한 여자 들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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