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와이프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12월 초 주말.
처갓집 식구들과 점심부터 갈비에 와인을 한잔했다. 몇 잔 먹지 않았는데도 취기가 올라온다.
와인은 술 취급도 안 하던 나인데,
대낮의 와인은 제법 술 같다.
처가 식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와이프의 표정이 급격하게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내 말에 웃지도 않으며 대꾸도 없다.
뭔가 잘못됨을 감지했지만 처가 식구들이 앞에 있기에 그냥 모른척해본다. 괜히 그 자리에서 어설프게 달래주려 하다가 왕갈비 뼈에 한 대 맞을 수도 있으니까.
처가 식구들과 헤어지고, 우리는 집으로 향한다.
진돗개 1 발령.
사건의 전말을 보니 모임 자리에서 대화를 이어가던 중 내가 와이프의 말을 자꾸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의 말에 동조해 주지 않고 자꾸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사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떤 이야기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술도 한 잔 먹었겠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나도 할 얘기는 해야겠다.
그래 오늘 한 번 개겨보자.
"아 알겠어 미안해. 그런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야? 화를 내는 임계점이 너무 낮은 거 아니냐고."
와이프의 눈빛이 변한다. '그래 너 오늘 잘 걸렸다. 짖을 만큼 짖어봐. 선처란 없어'의 눈빛.
내지르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막상 내지르니 오히려 살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다.
지나간 시간과 뱉어진 말은 되돌릴 수 없다는데.
와이프의 분노에는 약 다섯 개의 단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 단계는 그나마 감당 가능한 수준의 대응 단계다. 나름 나에게 모진 말을 하겠다고 노력하는데, 나에게는 전혀 상처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대응법은 일단 웃겨줘야 한다. 그녀의 입에서 피식이라도 나오는 순간 상황은 종료된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버거워지는 구간이다. 특히 야외에 있다면 더더욱. 빠르게 걸으면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지만 축지법 수준의 걸음걸이가 나온다. 누가 봐도 '나 화났어요' 하며 씩씩거리는 뒷모습은 덤이다.
안 따라갈 수도 없고, 따라가서 붙잡아봐야 길거리에서 공개 처형 당할 것이 눈에 뻔하다. 이럴 땐 공개처형을 당하더라도 따라가서 붙잡는 것이 낫다. 안 잡으면 안 잡는다고 후폭풍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몇 번 뒤따라 가는데 옆에 마주 오던 커플이 눈빛으로 응원해 주기도 하더라.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에 치우쳐져 있는 단계라 볼 수 있다. 전문용어로 객기라 부른다.
북꿈이네도 이 단계까지 간 적이 몇 번 있다. 충북 보은, 경북 경주, 경기도 시흥 오이도. 길도 모르는 와이프가 시속 30km로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차 세우라며 문을 열라 하더라. 그러다 진짜 차 문이 열린 적도 있는데, 다행히 뛰어내리진 않았다.
이 단계부터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오마카세에서 최고의 재료를 손님들에게 내어주는 것처럼, 와이프에게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최고의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구간이라.
내 손이 닿는 모든 곳은 소독의 대상이 되는 단계다. 미안하다고 손을 잡으면 경기를 일으키며 손 세정제로 손을 닦기도 하고, 볼에 뽀뽀라도 할 경우에는 얼굴 가죽까지 벗으려 한다. 차려준 밥도 안 먹고 빨랫감조차 섞이려 하지 않는다. 빨래도 본인 것만 쏙쏙 뽑아서 갠다. 겁나 치사빵꾸.
대망의 최고 존엄 투명인간 구간이다. 여기서부터는 답이 없다. 대응의 방법이라고는 그저 내가 보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육성은 물론 카톡, 디엠, 손 편지 등 모든 것이 씹히는 구간이다.
그렇게 나는 투명인간 1일차를 맞이하게 되었다.
투명인간 1일차.
와이프가 밥도 혼자 차려 먹고 혼자 치운다. 내 밥그릇이란 없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싫어하는 와이프가 자꾸만 나를 피해 달아난다. 이렇게 우리는 꼬리잡기 게임을 하고 있다.
내가 거실로 나오면 방으로 들어가고, 방에 따라 들어가면 다시 거실로 나오고, 몇 번을 이렇게 하니 화장실로 도망가서 20분 동안 나오지 않는다.
화캉스 중이겠거니 했지만 그 안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우렁찬 화장실의 소음이 온 집안에 울려 퍼진다.
내 와이프 여전히 건강하네.
유산균을 얼마나 먹은겨.
투명인간 2일차.
한 침대에서 각자 다른 이불을 덮은 채 투명인간 2일차를 맞이한다. 아무리 부부 싸움 중이어도 블로그는 써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 방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노트북이 보이지 않는다.
가방 안을 뒤져봐도 노트북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와이프가 숨겨놓은 것이 분명하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사용 못 하게 하겠다는 심보.
그러나 나 김북꿈. 찾기의 달인이다.
예전 20살에 면허 따고 한창 운전에 재미가 붙었을 때, 매일 밤 아빠 차 키를 훔쳐 드라이브에 나섰던 적이 있다. 그때도 아빠가 매일 차 키를 숨겨놓곤 했었는데 나에겐 어림없었다. 장롱 속에서 찾아내고, 장판 밑에서 찾아내고, 신발 안에서 찾아내고.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야겠다. 와이프가 노트북을 숨겼을만한 장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와이프가 숨길만한 장소..
본인이 가장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자
우리 집에서 가장 정신없는 그곳..
냄새가 난다.
곧장 옷 방으로 향한다.
까꿍.
여기서 많이 외로웠지?
옷장 구석에 외롭게 박혀있던 노트북을 구출해 당당하게 컴퓨터 방으로 향한다. 아무리 부부 싸움을 했어도 할 건 해야지.
블로그에 업로드할 글을 작성한 뒤 서둘러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도 신경은 오직 한곳에 가있다. 이 비상계엄 투명인간 사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다 섬뜩한 무언가가 생각이 난다.
아뿔싸.
책상에 노트북 그냥 올려두고 왔다.
투명인간 3일차.
노트북이 또 사라졌다. 내가 노트북을 찾아내 사용한 것을 보고 와이프가 다시 숨겼나 보다.
어제 노트북이 숨겨져있던 장소에 다시 가본다.
없다.
하긴, 여기에 다시 놨을 리가.
내가 노트북을 찾아내면 다시 숨겨놓는다라.. 그럼 노트북을 찾아내더라도 못 찾은 척을 해야 한다. 그럼 사용하고 다시 그 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되는 거네?
자, 그럼 다시 노트북의 행방을 찾아보자.
일단 노트북을 회사에 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무거운 거 드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와이프라.
그럼 이 집 안 어딘가에 있다는 건데. 다시 옷 방에 숨겨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미 냄새를 맡았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 심지어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와이프가 옷 방에 들어간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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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장소는 딱 한 곳뿐이다.
와이프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며 행동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본인 눈에만 안 보이면 완벽하게 숨겼다고 착각하고 있을 사람.
하지 말라는 것을 할 때는 언제나 짜릿하다. 분명 블로그를 쓰고 있음에도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밖에서 발소리라도 나면 괜히 등줄기에 식은땀이 난다.
이번에는 노트북을 사용하고 다시 제자리에 숨겨놓는다. 내가 노트북을 찾아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장소에 숨겨놓을 것이 뻔하기에.
투명인간 3일차 저녁.
오후가 되어서야 출근을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퇴근이 늦어질 것 같다. 새벽 두시는 되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카톡을 보내봐야 어차피 씹힐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카톡을 하나 남겨 놓는다. 아무 통보 없이 새벽에 집에 들어가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을 하긴 할 테니까.
별 기대 없이 카톡을 남겨놓고 다시 일을 하고 있는데, 와이프에게 드디어 카톡 답장이 온다.
투명인간 3일차만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와이프.
어떤 카톡이 와있을까.
내 잘못들에 대한 장문의 카톡이 와있을까.
아니면 나를 집에서 내쫓으려는 내용의 카톡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카톡방에 입장한다.
잠옷 하나 사주면 이 비상계엄 사태가 해결이 될 느낌이다. 앞뒤 재지 않고 당장 주문을 완료한 뒤 와이프에게 주문 사실을 알린다.
그러자
또 보이스피싱에 당한 건가.
본인의 목적을 달성한 와이프는 곧바로 다시 태세 전환에 나선다. 정계에 입문하면 아주 잘 적응할 사람이다.
와이프의 비상계엄으로 인한 투명인간 사태는 잠옷이라는 당근책을 제시하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
비상계엄은 늘 우리에게 상처를 남긴다. 이번 투명인간 사태에서 3만 원이라는 거금을 쓰고 나서야 와이프를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한결 기분이 나아진 와이프가 나에게 다가와 이런 제안을 한다.
“원래 화해를 해도 노트북을 돌려줄 생각은 없었거든? 그런데 너에게 특별한 기회를 줄게.”
왜 노트북을 인질로 잡고 난리.
그 특별한 기회라는 게 뭔지 들어나 보자.
"어떤 기회?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건데?"
와이프가 음흉하게 씨익 웃으며 이야기한다.
"이 집 안 어딘가에 내가 노트북을 숨겨놨거든? 지금부터 딱 1분 줄게. 1분 안에 찾으면 다시 노트북 가져가서 써"
노트북을 1분 안에 찾으라는 와이프.
어이가 없다.
1초 만에 노트북을 들고 와이프 앞에 나타난다.
나에게 농락을 당했다는 사실에 와이프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투명인간 사건 이후 후폭풍이 있다면, 와이프와 화해는 했지만 모든 것이 연애 초반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모든 스킨쉽이 리셋되었기 때문이다.
어제 손잡는데까지는 성공했으니 오늘은 뽀뽀까지 진도를 빼 봐야겠다.
연애고수님들,
와이프랑 스킨쉽 진도 빼는 방법 좀 알려주십쇼.
정말이지, 와이프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