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와이프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8월의 어느 캠핑장.
삐질삐질.
아니 콸콸콸.
날씨가 매우 무덥다. 이런 날씨에 캠핑을 하는 미친 사람이 있나 싶지만 그게 우리다. 선풍기에 캠핑용 에어컨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문명은 초라하기만 하다.
“여보! 여기 와서 이것 좀 잡아..ㅈ..”
휘릭. 쿠당탕탕.
엇.
트렁크빤쓰와 다를 것 없는 헐렁한 반바지의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떨어진다. 울퉁불퉁 제각각 생긴 캠핑장 파쇄석 위로 장렬하게.
아이폰XS.
나와 6년째 함께하고 있는 소중한 내 친구.
핸드폰에 크게 욕심도 없고 기본 기능에만 충실한 유저라 핸드폰이 오래됐어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가끔 기분 전환 겸 케이스만 바꿔줘도 새 폰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은 충분했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꿀 이유가 없었다. 물에 흠뻑 젖어도, 2m 아래로 떨어져도, 뜨겁게 달궈진 바베큐 그릴에 모르고 올려놨을 때도 내 아이폰XS는 늘 살아남아왔다.
이번에도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살아있을 거기에.
느긋하게 파쇄석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줍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멀쩡하다. 액정 필름에 살짝 금이 가 있긴 하지만 필름이야 교체하면 되니까.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텐트 안에 넣어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캠핑을 즐겨본다.
먹고, 마시고, 치우고
먹고, 마시고, 치우고의 연속.
헤롱한 정신과 함께 2024년 한여름 밤이 지나가고 있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밤 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시냇가의 졸졸졸 물소리, 개골개골 개구리울음소리까지 완벽하다. 이게 진정한 여름이지.
옆을 돌아보니 와이프는 매운 오뎅을 입 주변에 잔뜩 묻혀가며 정신없이 먹고 있다.
모닥불에 비친 와이프의 모습은 이 여름을 더욱 빛나게 한다.
어우 쒸.
전설의 고향.
납량특집.
어젯밤 전라북도 장수군의 처녀귀신과 함께 모닥불 앞에서 담소를 나눈 기억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핸드폰을 집어 든다.
페이스 아이디로 잠금 해제를 하려는데,
잠금 해제가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비밀번호로 잠금을 해제한다.
어제 와 있는 카톡에 답장들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ㅂ자가 눌리지 않는다.
카톡 뒤로 가기도 눌리지 않는다.
'아.. 설마..'
설마는 현실이었다.
아이폰XS가 고장 났다.
어제 떨어뜨려서 찍혀 있는 왼쪽 액정 부분이 대부분 터치가 되지 않고, 페이스 아이디도 되지 않는다.
망할.
핸드폰이 고장 난지 두 달이 가까워지지만 나는 꿋꿋하게 존버 중이다.
페이스 아이디 없이 비밀번호로 로그인하고 있으며 카톡 키보드도 천지인 키보드로 바꿔 사용하고 있다.
천지인 키보드로 바꾸고 난 이후로는 와이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 중이다. 한 번 언쟁이라도 발생하면 카톡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인 키보드는 나의 전투 기동력을 많이 떨어뜨린다.
그녀의 분노가 담긴 한 문장에 꾸역꾸역 답장을 하고 있으면 곧이어 여러 개의 카톡 폭탄이 도착한다. 그러고는 "왜 답장 안 해? 읽고 씹는 거야?" 하며 2차대전으로 몇 번이나 번질 뻔했다.
그 사이 살고 있는 집도 매도가 되어 이사 계획이 잡혔다. 이사 가는 김에 통신사도 이동해서 인터넷 설치를 새로 할 생각에 약 두 달째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나란 놈.
정말 징하다.
11월 이사 다음 날 아침.
이사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제 핸드폰을 바꾸며 인터넷 설치만 하면 된다.
핸드폰 매장에 전화해 오늘의 시세를 확인해본다. 영업용 멘트겠지만 어제보다 오늘의 조건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옳지. 지금이구나.
모짜렐라 치즈처럼 침대 위에 녹아있는 와이프를 간신히 일으켜 세운다. 어제 이사를 한 건 나인데 왜 본인이 녹아있는지.
어쨌든, 와이프와 함께 핸드폰 매장에 도착한다.
바글바글.
사람이 많다.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직원이 나에게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아까 아이폰16 화이트 512G 예약하신 분 맞죠?"
준비해둔 계약서에 개인 정보와 서명을 휘갈긴다.
'요즘 계약서 진짜 많이 쓰네. 그만 쓰고 싶다.'
계약서 작성이 끝나자마자 아이폰16 박스가 내 앞에 놓인다. 기분 좋은 언박싱의 순간.
박스를 열자 아이폰16 512G가 내 앞에서 본인의 미모를 뽐내기 시작한다.
반짝반짝.
얼마 만의 새 핸드폰인지.
"우와~~! 진짜 예쁘다!!!"
휘릭.
박스 안에 있는 새 핸드폰을 와이프가 먼저 집어 들며 여기저기 지문을 묻혀댄다.
조졌네.
새 핸드폰이 중고폰이 되는 마법.
제발 내려놔줘. 불안해
그러더니 본인의 얼굴에 갖다 대며 생전 처음 보는 애교를 뽐내기 시작한다.
"여뽕, 이거 어때? 나 화이트 잘 어울리지 않앙?"
내려놓으라고. 그거 내꺼라고.
이제 새 아이폰16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하고 데이터를 새 폰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씨익 씨익. 그르렁 그르렁. 하악 하악.
핸드폰 매장 안에 성난 멧돼지의 숨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니 와이프다.
얼굴에 독기가 가득한 와이프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 본다.
"왜 그렇게 씩씩 거리고 있어?"
성난 멧돼지의 모습은 이내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이제는 울 듯 말 듯 눈물이 그렁그렁 한 모습으로.
"나도 폰 바꾸고 싶어. 밖에 돌아다녀 보면 나만 카메라 렌즈가 두 개여서 창피해."
생각해 보니 와이프의 핸드폰도 아이폰 12다. 벌써 4년 정도는 썼으니 꽤 오래 쓴 것이다. 그래, 이참에 와이프도 함께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하다.
"그래 알겠어. 여보도 상담받아보자. 색깔은 어떤 색으로 할래?"
와이프의 표정이 화사하게 바뀌며 어금니의 금이빨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나는 무조건 화이트! 둘 다 화이트로 해서 커플폰 느낌 나게 하자!"
둘 다 같은 색상이면 헷갈리지 않을까. 하긴, 와이프는 핸드폰에 매번 주렁주렁 이상한 것들을 매달고 다니니 헷갈일 일은 없겠다.
"사장님~ 와이프도 화이트로 할게요!"
몇 분이 흘렀을까. 사장님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객님, 죄송한데 지금 아이폰 16 512G 화이트 색상은 재고가 없어요.."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은 와이프가 내 화이트 색상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본인 품 안에 꼭 움켜쥔다.
"아내분을 보니, 아까 고객님꺼 화이트 색상을 아내분이 하시고 고객님은 다른 색상을 하시는 게 좋아 보이는데요.."
아.. 나도 무난한 화이트가 좋은데..
어쩐지 아까 언박싱 때 내 폰 같지 않더라니.
"아.. 그럼 아무 색이나 준비해 주세요.."
이번에도 당했다. 혹 떼러 와서 혹 붙여가는 것도 모자라 눈뜨고 코까지 베인 기분이다.
결국 나는 예정에도 없던 블랙으로 핸드폰을 바꾸게 되었다.
아오 진짜.
집에 가는 길.
본인의 목적을 달성한 와이프는 아무 말이 없다. 와이프는 새 핸드폰 세팅에 푹 빠져있다.
그러다 이리 들어보고 저리 들어보고, 거울에 본인 얼굴과 핸드폰을 들이대며 부비적 부비적거린다. 셀카도 한 장 찍더니
“오! 여보 이것 봐봐. 아이폰 16은 보정 같은 것도 되나 봐. 일반 카메라인데 이렇게 잘 나와.”
운전하는 내 모습도 찰칵찰칵 찍어댄다.
그리고 결과물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아니네..”
그러다 와이프가 무언가를 발견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까지 한다.
뭐야 아이폰 16도 카메라 렌즈가 두 개네?
"망했다.
프로로 샀어야 하나 봐. 지금 다시 못 바꾸지..?"
응 못 바꾸지. 차라리 남편을 바꿔.
정말이지, 와이프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