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이: 35세
이름: 유이자
좌우명: 옷은 잘못이 없다. 그 옷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만 있을 뿐.
"오빠!! 내가 사라고 한 옷 샀어?"
아침부터 시끄럽다. 꿈이면 좋겠지만 분명 현실이다. 와이프는 며칠 전부터 나에게 어떤 옷을 사서 입으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리고 있다.
'잠깐, 그 브랜드 이름이 뭐였더라. 아 톰브라운.'
사실 어제 혼자 백화점에 다녀왔다.
셔츠 하나가 얼마나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가격표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무슨 셔츠 하나가 백만원이 넘는지.
“아니, 아직 안 샀어. 셔츠 하나가 너무 비싼 거 아니야? 굳이 저렇게 비싼거까진 안 입어도 되잖아..”
부심이의 한숨 소리가 거실 바닥에 떨어진다.
"하.. 이번주에 고등학교 친구 결혼식이라니까? 거기 가면 애들 다 마주칠 텐데 남편이 빛나야 내 기가 살지 않겠어? 애들한테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이따가 백화점 같이 가."
부심이는 유독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예민하다. 도시에서 늘 경쟁하며 자라서 그런지 남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거절할 수 없다. 맞춰줘야지.
"알겠어. 온유도 데리고 갈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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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충청도 시골에서 자랐다. 시골에서 마땅히 놀 게 없어서 했던 공부 덕에 농어촌전형으로 인서울 4년제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운이 좋게 바로 취업이 됐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에너지 공기업에.
부모님도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할아버지에게 농사일을 물려받아 평생 농사만 짓고 사셨던 분들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 차는 늘 포터였다.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 집 차가 포터인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영수네 집도 포터, 상철이네 집도 포터, 반 애들네 집 대부분은 집에 포터가 있었으니까.
스무살이 되어 대학에 가고 나서야 알았다. 대부분은 세단을 타고 다니는구나. 집에 차도 몇 대씩 있구나.
나는 참 순박했지만 행복한 사람이었다. 코딱지만 한 동네에서 서로 비슷하게 살아가니 비교할 대상도 없었고 그래서 그런지 불행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다.
취업을 하고 난 뒤,
부모님은 나에게 항상 이런 말씀을 했다.
"돈 생기면 허튼짓하면서 땅에 뿌리고 다닐 생각하지 말고! 땅에 묻어둘 생각을 혀. 사람은 뒤통수쳐도, 땅은 뒤통수 안 지니께! 나중에 니를 지켜주는 건 땅밖에 없을겨!"
땅친자. 땅에 미친 자. 우리 아버지가 그렇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이 세종특별시로 변신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사뒀던 전의면과 조치원읍의 땅값이 몇 배가 오르면서 아버지의 땅부심도 덩달아 몇 배가 오르게 되었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 돈 쓰는데에 관심이 있었을리가. 취업하자마자 주택청약에 꼬박꼬박 돈을 넣고 유튜브로 배운 적금 풍차 돌리기로 돈도 꽤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선배의 권유로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이름: 최부심.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는 빛이 났다. 세련된 얼굴에 우아한 말투. 최부심이라는 이름처럼 본인을 사랑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그녀.
만난 지 10분 만에 나는 깨달았다.
이 감정은 틀림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게 되었고, 결혼을 약속하는데도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빠..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인생에 한 번뿐인 이벤트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고 싶어.."
사실 부심이의 사치는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보여지는 것에 더욱 집착을 하게 된 것 같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이벤트'라는 마법의 문장은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지'에서 '남들보다 더 좋은 거 해야지'로 전환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욕구들을 사람들이 인정해주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심이의 소비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저도 인친님처럼 살고 싶어요]
[대박, 인친님 결혼 짱 잘하시는 듯ㅜㅜㅜ}
[인친님 드레스 정보 좀여!!]
[예랑님도 부심님이랑 찰떡!!]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그 인정의 욕구가 부심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쁘고 비싼 것들로 치장한 와이프와 함께 다니면 어깨에 뽕이 들어갔다. 학창 시절 친구인 시골 촌놈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출세했다며 힘을 잔뜩 실어주었다.
생전 처음 차보는 롤렉스 시계, 명품 결혼반지, 비싼 옷들은 어딘가 불편하긴 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백화점 직원들은 항상 나를 극진히 모시듯 했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구차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됐다. 물건 하나하나로 나의 많은 것이 설명이 되는듯했다.
신혼집을 고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땅에 묻어두라는 부모님의 말이 떠올라 구축 아파트라도 매매하는 게 어떨까 했지만 부심이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사실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은 부심이에게 한 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호갱노노 월간 방문자 수 5위에 빛나는 대둔산센트럴자이아이파크 에듀메트로시티리버파크포레온.
나도 이곳에 살아보고 싶었다.
시골에도 소나무는 많았지만 이곳의 소나무는 더 고급져보였다.
유리 난간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고급 리조트에 와있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만든 인공 호수지만 이미 이곳에는 오리 가족이 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도시적이면서도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예쁘고 반짝이는 부심이와 딱 맞는 아파트.
그리고 그 옆을 걷고 있는 나.
모든 그림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날의 작은 충격 전까지는..
1년 전, 신혼집 전세 계약일.
대둔산센트럴자이아이파크 에듀메트로시티리버파크포레온의 사전점검이 있던 날.
터벅터벅.
부심이는 회사 일정 때문에 함께 오지 못했다.
터벅터벅.
나 혼자 집을 보고 전세 계약을 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였던 단지가 옷을 입고 나무를 심더니 지상 낙원으로 변해있다.
터벅터벅.
푸드트럭에서 아이스크림과 음료를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부동산 아줌마로 보이는 분과 집을 보러 다니는 신혼부부들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나다.
사전점검일,
유튜브로 사전점검하는 방법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우리의 보금자리가 될 곳에 하자가 있으면 안 되니까.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든 하자를 다 잡아낼 생각이다. 가방에는 물티슈와 줄자, 포스트잇과 스티커도 준비되어 있다.
아 잠깐만.
하나 빼 먹었다.
젤 중요한 양동이..!
아 어쩌지!
"사장님, 혹시 근처에 철물점 같은 곳 있나요?"
"철물점은 왜요~?"
"아 제가 깜빡하고 양동이를 놓고 와서요.. 허허.."
부동산 아줌마가 날도 더운데 뭔 시답잖은 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본다.
"사전점검을 대신해주려고요? 사전점검은 집 주인이 하는 거예요. 이미 오전에 다 하고 가셨어요. 집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계약하세요. 전세 3억짜리 물건 이거 하나 남았어요."
아.. 사전점검은 집주인이 하는 거구나.
나는 우리가 살 집이니 우리가 하는 줄 알았다.
더워서 그런 건지, 민망해서 그런 건지.
등줄기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다.
집을 보니 해도 잘 들어오고 전체적으로 괜찮다.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부심이에게 전송해 본다.
부심이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동영상이 전송된 지 얼마나 됐을까 곧바로 키친핏 냉장고와 소파, 침대의 사진이 마구마구 도착한다.
이미 이 가상의 공간에는 우리의 혼수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이다.
"오빠 그냥 오늘 계약해!"
"집주인이 아직 이 근방이라 계약하신다 하면 잠시 들르겠대요. 계약하실 건가요?"
집을 본 지 10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계약 이야기가 오고 간다. 지금 전세 3억에 나와있는 매물은 이 집 하나라고 한다.
선택지가 없다.
일단 콜.
곧이어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부동산에 들어온다.
아이를 들춰 안은 아기 엄마.
아이는 엄마의 품 안에서 뒤로 뻐대고 있다.
"안녕하세.. 악! 야야야 잠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기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만지고 있지, 애 엄마는 그런 아기 말리느라 정신이 없지. 난장판이다.
정신없는 사이 모든 계약이 마무리된다.
전세 잔금은 아파트 입주 날짜에 맞추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임대인, 임차인 두 분 계약서에 뭐 잘 못 된 거 없나 확인해 주세요^^"
다시 한번 계약서를 천천히 읽어본다.
임대인 주민번호: 950428-2xxxxxx..
95년생. 부심이와 동갑인 32세 임대인.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다.
그런데 심지어 애까지 있다.
나이는 내가 더 많지만 어렵게만 느껴진다. 어른을 만난듯한 기분이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부러움은 아니다.
질투심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기분이 이상할 뿐이다.
내가 갖지 못한,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을 먼저 걸어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일까, 비범한 사람일까.
이날 이후로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하루짜리 인정의 욕구에 돈과 시간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맞는 방향인건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