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직이 되고 제일 좋은 건

조직을 망하게 하는 회의를 회의한다

by 필우

직장을 그만두고 1년짜리 계약직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났다. 내게 압박감이 사라지면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무엇으로부터의 압박이었나? 생각해 보니 '내게 회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회의 없는 게 이렇게 좋을 일인가?


회의 참석자 입장


부서장이 되면 시장 또는 부시장, 국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정기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다. 일주일 한 번 아니면 한 달에 한 번 개최한다. 이와는 별도로 타 부서에서 협조를 구하기 위해 관련 업무 부서장에게 참석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홍보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대규모 행사나 사건, 사고가 났을 경우 단골손님이다. 태풍, 한파 등 자연재해와 사회재난이 발생하면 비상대책본부가 꾸려지고 여기도 과장급 간부가 주로 참석한다.


담당자가 회의 일정을 알려주면 부서장은 가장 먼저 캘린더와 휴대전화기에 메모를 해 둔다. 참석 일시와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회의가 외부에서 개최하면 이동시간까지 감안해야 한다. 나도 시청에서 회의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출발 전 공문을 보니 길 건너 국민연금공단 건물이었다. 서둘러 갔지만 회의는 이미 시작되었었다. 직원 탓 할 게 아니다. 참석하는 당사자가 챙겨야 한다.


일단 참석을 하게 되면 그다음 고민이 시작된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회의자료도 미리 보고 참고사항이라도 챙길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늦었다. 회의를 주관하는 부서에서는 관계자라고 불렀는데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생각 없는 부서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것보다 당황스러운 일은 회의를 주도하는 고위직 간부가 질문을 할 때다. 그래, 홍보부서에서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지? 질문이 안 나오길 기도할 뿐이다.


관련 부서장으로 참석하였지만, 나는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다.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는 회의는 가능하면 짧게 핵심만 이야기한다. 참석자들에게 도움이 될 말만 한다. 어떤 부서장은 보고서 자료를 그대로 줄줄 읽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갉아먹는 행위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하지 않는 이유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한 마디하게 되면 담당 부서에서는 피드백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일이 생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난 후 팀장이나 담당자가 내게 다가와서 '말씀이 없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적이 몇 번 있다. 이런 회의를 도대체 왜 하는 거지


부서장을 참석시켜야 하는 직원의 입장


회의 업무는 과장 못지않게 직원을 괴롭힌다. 회의 제목과 장소, 시간을 알려주면 과장이 한 마디 한다. 내가 참석할 필요가 있나? 아무래도 행사가 임박한데 윗분들이 홍보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모양입니다. 담당자인들 하고 싶었겠나.


회의시간이 되면 과장이 시간 맞춰 참석하는지 눈치를 살펴야 한다. 알아서 가주면 고맙지만 뭉기적뭉기적하면 한마디 거들어야 한다. 과장님, 회의 가셔야 합니다. 민방위 복으로 갈아입으시고요. 회의를 주최하는 부서에서는 발발이 전화가 온다. 시장님 곧 자리에 앉으실 텐데 뭐 하고 있습니까? 네, 출발했습니다(과장은 옷 갈아입는 중). 나는 가끔 중국집 배달이 떠오른다.


이렇게 참석해 주는 과장은 그래도 나이스한 분이다. 시간 다 되었는데 자리에 없어서 전화해 보면 속이 뒤집히는 말을 하는 과장도 있다. 나 못 가겠어, 옆 부서 과장이나 팀장 가라고 해. 열불 난다. 시장이나 부시장 회의라면 이미 좌석배치도를 책상에 깔아놓았을 텐데 어쩌란 말이냐! 대신 가야 하는 과장이나 팀장은 무슨 죄.


회의를 이끄는 간부의 입장


나는 1년 반 동안 과장을 하면서 내가 먼저 회의를 하자고 한 경우는 한 번이다. 내년 신규사업 아이디어를 제출해야 하는데 공무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전문가를 부르자고 했다. 모르긴 해도 담당자는 사람 모으고 회의시간 정하고, 안건 만드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미안타.


주간회의를 마치고 오면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팀장 회의를 소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가능하면 의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전달하든지, 앉더라도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세 번 정도는 회의('의심을 품다'는 의미) 해야 한다.


회의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가?

참석자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개인적인 목적('지식을 넓히려고, 책임을 피하기 위해, 권위를 세우려고' 등등)을 위한 회의인가?


조직을 망하게 하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은 회의를 해야


회의가 없다는 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 나도 좀 의아했다. 생각해 보니 회의는 내 삶의 주도권을 뺏고 나를 구속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발 더 들어가서,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는 것, 내가 계획한 대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회의를 하는 부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회의를 주관하는 간부는 세 번의 의심을 품고 회의를 줄이거나 없애면 좋겠다. 회의에 참석하는 부서장은 시간 지켜 참석하고 발언을 하지 않거나 핵심만 이야기하자. 부서장을 참석시켜야 하는 담당자는 회의개최 사실만 정확하게 알려주고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자. 챙겨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부서장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직장 그만둔 지 17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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