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독하는 우리 아이, 어쩌면 좋죠?
속독 습관을 바로잡는 법
책을 좋아하면 국어를 잘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진영이는 국어 성적도 자꾸 떨어지고, 수학 문제는 읽어도 이해를 못해요.
초등 5학년 진영이는 꼬마 독서광입니다. 하루 3~4권은 기본이라고 할 만큼 책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공부머리는 좋지 않습니다. 교과서를 읽어도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응용 문제도 잘 풀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독서 수업을 하다보면 이렇게 공부머리가 안 좋은 독서광을 종종 만나게 되죠.
책을 많이 읽어서
효과를 보는
아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다
독서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아령운동을 하는데 근육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책을 읽는데 언어능력이 오르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매일 책을 읽는데 언어능력이 낮다는 것은 아령 운동을 매일 100개씩 하는데 근육이 안 생기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딱 하나뿐입니다. 운동을 한다고 방에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아령을 들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책을 좋아한다고 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에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위에 이런 아이가 있다면 한번 찬찬히 관찰해보세요. 백이면 백 책을 읽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를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들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구경하는 겁니다. 그러니 100권, 아니 1000권을 봐도 아무 효과가 없을 수밖에요.
독서 지도의 성패는 속독을 얼마나 방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속독은 나쁜 독서 습관의 99%를 차지할 정도로 만연해 있는데다, 한번 버릇이 들면 헤어나오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죠.
속독의 3가지 유형
속독 습관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아이가 어떤 유형의 속독을 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속독에는 크게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속독의 유형에는 크게 문단 파악형, 스키형, 플롯 파악형이 있습니다.① 문단 파악형
첫 한두 페이지는 빠른 속도로 글을 읽습니다. 대강의 방향이 파악됐다 싶으면 문단에서 몇몇 문장만 빠르게 훑어보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삽화가 나오면 속도를 늦추고 글의 일부를 읽습니다.
<특징>
- 초고속 독서. 3시간짜리 장편동화를 30~40분 안에 읽음
- 스토리를 매우 엉성하게 파악함
- 아주 구체적인 몇 장면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음(자신이 실제로 읽은 부분)
- 읽고 이해하는 게 귀찮아서 속독을 함
② 스키형
'문단 파악형'이 문단의 몇 문장을 대충 읽고 다음 문단으로 건너뛴다면, 이 유형은 눈으로 줄글을 훑어내리는 유형입니다. 영화를 4배속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죠. 굳이 따지자면 '문단파악형'보다는 스토리를 좀 더 잘 파악하지만, 상황을 오해하거나 심리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징>
- 3시간짜리 장편동화를 1시간~1시간 30분 안에 읽음
- 스토리를 엉성하게 파악함
- 책 내용을 이야기할 때 매우 간략화하는 경향이 강함
- 읽고 이해하는 게 답답해서 속독을 함
③ 플롯 파악형
이 유형의 아이들은 '속독을 하는데 공부머리가 좋아요'하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속독도 좋은 독서구나'하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죠. 실상은 책을 읽어서 언어능력이 높은 게 아니라 기본 언어능력이 높은 아이가 책을 별 소용없이 읽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유형의 아이들은 중요한 사건이 전개되는 문단을 꼼꼼하게 읽지만 브릿지가 되는 문단은 과감하게 건너뛰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이렇게 이야기 구조를 알고 경중을 판단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똘똘한 아이라는 것을 방증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책을 읽어도 타고난 언어능력 이상의 성장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죠.
<특징>
- 3시간짜리 장편동화를 1시간~1시간 30분 안에 읽음
- 스토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남
- 인물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깊은 심리를 잘 읽어내지 못함
- 뒤가 궁금해서 속독을 함
아이가 어떤 유형이든 속독은 독서를 무력화시킵니다.
언어능력은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량에 의해서 향상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좋은 독서인데, 속독은 기본 사고량조차 증발시킵니다.
"만약 신께서 당신에게 한 가지 능력을 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능력을 받고 싶습니까?"
어느 기자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에게 물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속독 교재에 실린 내용입니다. '봐라. 빌 게이츠도 속독 능력을 원하지 않느냐!' 는 것이지요. 이 교재의 내용 자체가 속독이 얼마나 나쁜 독서법인가를 방증합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독서가인 빌 게이츠가 속독 능력을 원한 이유는 속독 능력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능력, 시간 여행을 할 능력을 가질 수 없듯이 말입니다. 속독 교재를 쓰신 분이 인터뷰의 내용을 완전히 오독한 것입니다. 어려운 텍스트도 아닌데 말이죠.
속독습관을 바로잡는 3가지 방법
속독은 한번 습관이 들면 단시간에 바로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내심을 갖고, 멀리 보고 가야할 길이지요. 속독 습관을 바로잡는 몇 가지 방법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속독이 나쁜 독서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아이가 속독이 나쁜 것이라는 것만 납득해도 책 읽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속독을 하는 아이들 중 다수는 속독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3시간 걸릴 책을 나는 1시간만에 읽었으니 내가 더 대단하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가만히 두면 책 읽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큽니다. 속독은 책을 구경하는 행위, 책은 원래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읽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세요. 속독이 나쁜 독서라는 점만 인지해도 더 빨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② 방학맞이 독서퀴즈 이벤트하기
선물을 걸고 독서퀴즈 이벤트를 해보세요.속독이 나쁜 독서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속독 습관에서 탈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천히 읽고 깊이 이해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혼자서 하기가 힘들다는 것인데요.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이 '방학맞이 독서 퀴즈 이벤트'입니다. 먼저 아이와 상의해서 방학 때 읽을 책 4권을 정해보세요. 그리고 일주일에 1권씩 읽고 독서퀴즈를 하는 겁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 아이는 책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애를 쓸 거예요. 만약 아이가 4권 모두 훌륭한 결과를 낸다면, 4권의 책을 깊이 이해하는 경험을 쌓은 것입니다. 물론 이벤트가 끝나고 나면 아이의 책읽기 속도는 다시 빨라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 이전보다는 확연히 늦춰질 거예요.
③ 슬로리딩 프로젝트 참여하기
책 한 권을 톺아보는 슬로리딩은 아이에게 전혀 다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슬로리딩'은 부담 없는 분량을 제시하는 대신, 그 분량을 샅샅이 이해하는 독서법입니다. 속독과 정반대의 독서법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속독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줄거리를 파악하는 경험을 넘어 이야기 요소들을 해석해보는 과정을 통해 다른 차원의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죠. 독서의 전혀 다른 즐거움을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단독으로 진행하기 어려울 때는 공부머리 독서법 카페의 '슬로리딩 프로젝트'에 참여해보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공부머리 독서법' 카페의 모든 독서 프로젝트는 무료로 진행됩니다.
책 읽기의 진짜 즐거움을 만나는 순간.
이야기 속 인물의 감정에 깊이 빠진 나머지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때,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때, 너무나 놀랍고 경이로워서 지구가 자전을 멈춘 듯한 그 때!
단 한 번의 순간이면 됩니다. 아이가 책 읽기의 진짜 즐거움을 만나는 그 한 순간이 아이를 책 구경에서 벗어나 진짜 독서를 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독서를 시작하는 그 순간이 바로 속독을 그만두는 순간이죠. 부모가 해야 할 일은 그 순간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아이를 이끌어야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