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너머
2월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급하게 한 회원님의 건강 상의 이유로 급 바꾸게 되었다. 매년 회원님들의 추천 도서를 선정도서 목록에 넣고 있는데 하필 그 분이 추천한 책이 걸린 것이다.
1순위는 중고책이지만 없는 경우에는 2순위로 새 책을 구입하는데 이번 선정도서로 바꾼 책이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다. 보통 상 이상의 상태의 책을 사는데 이번에는 중 정도도 그냥 구입을 했다. 도착한 지 3일이 되어서야 박스를 열었는데 왠 걸... 표...표지가 없다. 중고를 잘 안 샀던 걸까. 이런 상황에 당황했고, 그러면 저자와 역자 소개도 없을까? 넘겨 본다.
없다. 그러면 '독서모임 오신 회원님들 저자들 다 조사해 보고 오신 건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저자와 역자 소개가 일반적으로 담겨 있는 책 날개와 표지를 사랑하는 1인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급 '새 책으로 살 걸'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손때가 엄청 묻은 거에 비해 속지는 완전 새 책이다. 그나마 여기에서 위안을 받아야 할까.
그러다 갑자기 책 표지를 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예전 아기 때 자주 싸던 달력은 없고, 신문지도 없다. 뭘로 싸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최근에 꽃다발 받았던 게 생각나서 그 종이를 이용해 보자며 책에 대어 보았다.
검정과 하양의 꼴라보로 책을 싸면 좋겠는데, 책을 싸기에는 좀 두껍지만 살짝 코팅이 되어 좋았다. 먼저 검정으로 쌌다.
정말 수십 년 만에 책표지를 싸는데 기술이 안 죽었다. 싸고 보니 눈에 스크래치가 들어온다. 흰 종이로 싸야겠다 싶다가 [걷기예찬] 느낌이 나는 이미지를 넣고 싶어졌다.
라벨지로 출력해 흰 종이에 붙이고 띠지처럼 일부만 쌌다.
그리고 제목도 붙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제목이 필요했던 이유는 책꽂이에 꽂았을 때 제목이 보였으면 해서 예쁘지는 않아도 도전했다. 그리고 걷다가 클로버 찾던 추억이 떠올라 클로버도 넣었다.
책표지를 싸면서 예전에 좋아했던 영어 선생님이 추억 소환되었다. 영어 과목을 좋아해서 영어 책을 곱게 비닐까지 싸서 열공했었는데 처음에는 한지 한 색으로만 쌌다가, 3단으로 색을 더해 쌌는데 이게 마음에 들었던 같은 쌤을 좋아하던 친구가 자기가 한 것처럼 도와달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국 선생님 책이 예뻐보이는 것이니 만들어줬다. 그래서 이 세상에 둘 밖에 없는 영어 책이 완성되었다. 그 아이가 준 걸로 알았겠지만 나중에는 내가 만들어 준 걸로 알았을 거 같다. 똑같은 방법에 색깔만 달랐으니까.
책을 완성하고 보니 더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다. 신학기에 두툼한 달력을 찢어서 정성껏 교과서를 싸고, 큼직하게 과목을 매직으로 써 넣었던 초등학교 시절. 신학기의 설레임이 그대로 느껴져 [걷기예찬]을 들고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쓰고 보니 왠지 잊고 있던 추억을 불러오게 해서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과연 저 책을 들고 카페 가서 읽게 되려나 모르겠지만, 왠지 걷기 활동을 부르는 제목이다. 독서모임 단톡방에 책이 잘 안 읽힌다고 회원님 한 분이 글을 올리자, 다른 회원님이 걷기 1시간 정도 하고 읽어 보면 어떻겠냐고 한다. 서로 독려하는 모습에 웃음이 낫다. 이래저래 고마운 책이 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