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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싯적 문학소녀 Nov 05. 2022

나부터 에디팅, 사수 없는 세상

나의 과거의 커리어를 편집하면 지금의 내가 보인다!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개인적으로 글을 쓸 때 주제만 정하고 나머지 개요나 스토리는 쓰면서 풀어나가는 편입니다.

대학교 때는 이 지점에서 많이 혼났어요. 교수님 입장에서는 저의 방식이 글에서 드러났나 봅니다. 물론 혼나거나 과 친구들의 혹독한 비평 덕분에 점차 방식은 고수하되, 수많은 수정과 수정과 또 수정과 퇴고를 거쳐 글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죠. 

미리 스토리 라인을 정하지 않은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저 또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주인공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제가 글 속의 주인공이 된 듯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거든요. 


제 삶의 방식도 그런 것 같아요. 

저 끝에 제 목표점을 향해 이리저리 계획하는 것보다 지금 주어진 일을 열심히 스텝 바이 스텝 하다 보면 언젠간 무엇이 되어있으리라! 하는 이상한 믿음. 그냥 근거 없이 언젠가 성공하겠지, 근사한 집이 있겠지, 차도 있겠지. 의례 선배들의 멋진 라이프를 보면서 저도 그리 되리라 믿고 따랐던 것 같습니다. 20대 한정이에요. 


엄청나게 믿고 따랐던 사수 선배가 있었어요. 지금도 물론 정말 존경합니다. 앞으로 A사수 혹은 A선배라고 할게요. 저는 조금 특이할 정도로 A사수 선배의 이끌림(?)과 제안으로 20대를 보냈습니다. A선배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A선배의 이직과 함께 저의 자리도 결정되었고, 함께 일하는 게 즐겁고 배울 점도 많았어요. 친구들은 그러더라고요. 너처럼 편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는 애는 없다,라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제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A사수가 끌어주는 대 그저 묵묵히 일하다 보면 제가 그저 '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죠. 글을 쓰다 가도 이야기가 술술 풀리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결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파악하면서 쓸 필요가 있어요. 정말 이야기가 산으로 갈 수가 있거든요. 가끔 이야기 속에 몰래 끼워 놓은 암시와 복선조차 깜빡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랬어요. 


한 번은, A선배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회사를 울며불며 피치 못하게 퇴사한 적이 있어요. 다행히도 퇴사한 뒤에 많은 업계 선배들이 여기저기 일을 물어다 주셔서 자연스럽게 프리랜서로 일 하게 되었습니다(패션 업계는 항상 일손이 부족해요). 그러다 제안이 왔어요. 모 대기업 계열의 잡지사에 사람을 구한다. 면접 볼 생각 있니? 그 전 회사에서 일을 하기 싫어서 그만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였고 그 잡지사의 디렉터 분과 면접 일정도 정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곳이 정말 저와 맞나? 괜찮은 곳일까 하는 의문이 그제야 들더라고요. 그래서 A선배에게 물어봤죠. 


"선배, 모 잡지사에서 패션 에디터를 구한다는데 어때요? 잘 아세요?"


처음에는 축하해, 잘됐구나, 또 일해야지 등등의 격려의 말을 해주셨어요. 그런 분입니다. 


"근데 그 회사 00 디렉터. 그러니까 네 상사가 될 디렉터가 좀 별로..."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의 성격과 일하는 방식을 요목조목 알려주시며, A사수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분야나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패션 업계야말로 까탈스러운 에디터, 갑질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어요. 지금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식 선에 어긋난 말을 하는 선배들도 많았죠. 그래서 저는 선배가 에둘러 그런 말을 하는 의미를 잘 알아 들었고, 함께 일하던 사람이 중요했던 터라 면접조차 보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에야 그때 그곳에서 일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금 힘들 때 말이죠. 대기업이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프리랜서라는 직함보다 훨씬 더 멋진 이력이 되었을 테니까요. 후회는 아니지만(이걸 후회 아니라고 쓰면서도 후회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제 이력에 번번이 오랜 프리랜서 경력이 다음 회사 면접에서 걸림돌처럼 느껴질 때 생각나는 곳이긴 합니다. 


목표란 방향을 잡아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프리랜서의 삶을 살 예정이라면 그저 프리랜서로 끝나지 않고 나름의 사업을 꾸리거나 작가의 길로 간다거나 하는 등의 명확한 지점이 있어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때 잡지사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나 편집장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도 없었기 때문에 갈팡질팡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것 같아요. 이 글처럼요(ㅎㅎㅎ). 


누구나 성공하고 싶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성공하고 싶었어요. 성공의 정의가 뭔지 모르면서 말이죠.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입장에서 성공의 정의를 내려보세요. 그리고 목표점을 정해 보세요. 그러면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입니다. 잘 보이지 않나요? 그렇다면 나의 과거를 에디팅 해보세요. 오로지 하나의 외길을 걸어왔다면 순차적으로 내가 한 일을 나열해보고 거기서 얻었던 것을 정리해보세요. 만약 내가 패션 에디터를 했다가 브랜드 마케터를 했다가, 스타일리스트를 했다가 등등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해왔다면 그 분야끼리 나누고 그 일을 한 기간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해보세요.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한 일, 가장 즐겁고 성과가 있었던 일을 꼽는 거죠. 그 뒤 그 지점에서 앞으로 크게 뻗어갈 수 있는 일을 정해 보세요. 그렇게 나를 에디팅 했더니 저는 이제야 제가 무슨 방향으로 뻗어가야 할지 알아낸 것 같아요. 길을 가다가 잘 되지 않더라도 방향을 틀지 않고 내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도 생겼고요. 


시작해보세요, 셀프 에디팅. 지금의 나를 바꿀 수 있습니다. 




ps. 위 사례가 A사수의 원망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저에게 아주 귀한 답변이었습니다. 함께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저에게 '사람'이 가장 별로라고 콕 집어서 얘기해줄 수 있는 분은 역시 저와 가치관이 맞고, 저를 가장 잘 아는 A사수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니까요. 요즘은 많은 친구들이 '진짜 사수'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오죽하면 온라인 랜선 사수가 대세일까요. 같은 직장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고 온라인에서 스스로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시대 어린 친구들에게 부러운 일이고 저조차도 몰랐던 업무 지식을 쉽게 배울 수 있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언가 아쉽습니다. 살 비비고 일하고 성공의 기쁨과 실패의 짠맛을 느끼며 혼나고, 부딪치고, 눈물 짜고 등등의 일의 히스토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따르는 선배와 사수들의 가치관을 공유하기 어렵다는 것. 저는 그 가치관에서 지금까지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시작은 꼭 존경할 수 있는 선배가 있는 회사가 좋은 것 같아요. 알아요, '존경할 만한' 선배가 있는 회사가 어디에나 있진 않습니다. 아예 나를 이끌어줄 선배가 없는 곳도 있어요. 그 부분은 어느 정도 회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할 만한 선배를 배출하지 않고, 두지도 않는 윗선의 책임. 그리고 아예 선배나 관리자의 직급을 두지 않고 여러 신입에게 대량의 일을 맡기는 행태. 일의 퀄리티의 문제. 내가 성장하지 않는 것 같은 불만. 이게 더 나은 것인지 결정할 수 없는 판단의 부재. 큰 그림은 알지만 디테일은 모르는 타 부서 상사의 이상한 지시. 이해할 수 없는 회사의 시스템. 

프리랜서로 오랜 기간 일하며 이런 곳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오히려 협업을 하고 있는 저에게 의지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의지할 곳 없는 곳은 그들의 이탈이 언제든지 이뤄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연 스타트업이나 작은 회사들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에도 존재해요. 


간단하게 요약하려던 추신이 길어졌네요. 아무쪼록 좋은 사수가 있었던 저의 행운에 감사하며, 좋은 귀감은 아니라도 영감은 될 수 있는 선배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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