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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Jerk Oct 22. 2015

영원히 "아빠"로 남기

아버지를 거부하다

'엄마'는 나에게 결여되어 있는 말이다.

인류 가장 의존적인 말 '엄마'.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어머니가 셋이나 있다.
나와 누나를 낳은 어머니, 내 여동생을 낳은 어머니,

그리고 현재 아버지의 아내.

많다는 것이 반드시 풍요를 뜻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많을수록 멀어지는 것도 있다는 걸
유격 후 비오는 연병장에 나란히 누워 다같이

'어머니 은혜'를 부를 때 깨달았다.
눈물범벅으로 김이 오르는 얼굴들 사이에서

내 얼굴은 여전히 빗물에 추웠다.

엄마라는 단어를 서른 해 넘게 곱씹으면서
'외롭다는 건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은 뒤로는
아이를 키우게 되는 때가 오면

아프게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파할 줄 알고, 아픔의 의미를 아는 아이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분이나 있는 '어머니'와도 한참 먼

'엄마'를 못 배웠던 난
자연스럽지 못하게도

그 뜨거움을 물려 줄 필요조건들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 아닌 엄마의 필요조건에는
아버지 아닌 아빠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난 꼭 아빠가 돼야겠다.


아빠의 본질은 모순덩어리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
천하무적 슈퍼맨인데 집에서는 보는 모습은 늘 고단해 보이고, 세계제일 갑부인데 장난감 가격 앞에 한참 망설이고,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님인데 난처한 질문은 죄다 엄마에게 떠넘긴다.

하지만 동시에 아빠라는 건
이해할 수 없지만 친근한 사람,
잔소리하지 않는 용돈 지원군,
엄마 몰래 접선하는 비밀 결사대,
사랑한다면서 아이가 몇 반인지 늘 틀리는 사람,
사랑한다면서 늘 미안한 얼굴을 하는 사람.
머리보다, 마음으로 닿아 있는 사람이다.

자식에게 이해받는 때부터 아빠는 아버지가 되니까,

나는 아빠로 오래 살고 싶다.
자식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정말 그러면, 아이는 아빠의 여집합인

엄마를 배우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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