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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저널리즘 Sep 18. 2018

죽음을 기억하는 삶

bookjournalism #12 《적당한 거리의 죽음》


죽거나 죽이거나, 타살이든 자살이든 죽는 사람이 넘쳐난다. 어제도 드라마에서 한 인물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코미디 영화에서조차 칼부림과 살인이 빠지지 않는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은 아예 세트장을 장례식장으로 만들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급기야 20년 전 죽은 가수를 불러내 뉴스와 다큐멘터리, 영화에 등장시킨다.


가짜 죽음이 빈번한 시대에 도시인들은 관람자 모드를 취한다. 극 중 인물의 죽음이 전개상 타당한지 논쟁하고, 너무 쉽게 죽거나 도무지 죽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유명인의 죽음은 마치 가상의 죽음처럼 취급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나름의 해석을 붙이고 어디선가 들은 억측을 보탠다. 그러나 정작 실제 죽음 앞에서는 모두 입을 다문다.


수많은 유사 죽음을 경험했지만 현실의 죽음은 낯설기만 하다. 사흘 동안 황망히 조문객을 맞고 장례 절차를 따르느라 나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발인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죽음을 대면하지만 반추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떠나간 이의 빈자리는 큰데, 다시 마주한 일상은 처리해야 할 일들로 가득하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오래된 위로 앞에서 죽음에 대한 성찰은 완전히 실종된다. 도시는 생기를 잃지 말라고, 앞만 보며 나아가라고 등을 떠민다. 제대로 헤아려 보지 않은 죽음은 덮어놓고 외면하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기어이 곪아 터진다.


죽음을 배격하는 서울과 달리 파리는 죽음을 포용한다. 파리 시민들은 도심 한복판의 공동묘지를 즐겨 찾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영구한 두 번째 장례 의식을 치른다. 애도와 기쁨이 공존하는 의식이다. 파리의 묘지는 쉼터이자 산책로, 데이트와 만남의 장소가 된다. 다양한 삶의 풍경이 망자의 바로 곁에서 펼쳐진다. 일상적 공간을 넘어 반성과 성찰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떠나간 이의 묘에 꽃 한 송이를 내려놓는 사람, 연인과 간식을 나눠 먹는 사람, 가볍게 탭댄스를 추는 사람, 무덤가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사람. 아마도 이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가까운 이의 죽음과 언젠가 도래할 자신의 죽음, 나아가 죽음 그 자체의 의미를 생각하고 삶을 돌아보고 있으리라. 죽음을 기피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묘지를 떠올려 본다. 1년에 두어 번, 큰일이 있을 때나 몇 시간 넘게 달려 묘지를 방문한다. 그러고도 머무는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는다. 우뚝 솟은 봉분 앞에 덩그러니 놓인 소주 한 병이 어딘지 애처롭다. 죽음을 먼 곳에 두고 외면하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김세리 에디터




《적당한 거리의 죽음》읽기 -  https://www.bookjournalism.com/contents/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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