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둔 자리

by 보라의정원

나는 떠나도 괜찮다는 말을, 꽤 늦게 이해했다.

돌아갈 자리가 그대로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였다.


어릴 때는 몰랐다.

왜 어떤 순간에는 손을 내밀다 멈췄는지

왜 끝까지 따라오던 눈이 있었으면서도

나를 붙잡지는 않았는지.


그때의 나는, 그저

한 박자 늦게 다가오는 마음이 서운했다.

말없이 건네지는 것들은 알아듣지 못했고

혼자 걸어보라는 신호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멀어지려 했고

그래서 더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망설임이 사실은 하나의 방향이었다는 걸 안다.

나를 놓아버린 게 아니라

내가 걸어갈 수 있게 자리를 비워준 거였다는 걸.


붙잡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는 내가 더 잘 안다.


여전히 느껴진다.

말하지 않아도 이어져 있는 마음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웃던 밤들

그 모든 순간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걸.


손을 내밀다 멈춘 그 순간도

숨기려 했던 마음도

이제는 다 보인다.

그리고 다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안다.

멀리 가도 괜찮다는 걸.


그대로 있는 자리가 있기 때문에

말없이 남겨둔 온기 하나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그 사랑은 식은 적이 없었고

단지 나를 위해 온도를 낮췄을 뿐이었다.

나는 그 위에서 자랐고

그 위에서 결국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한 온기와 남겨진 자리는

나를 붙잡는 대신, 더 멀리 보내주었다.

아무 말 없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그리고 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문을 열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얼굴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거라는 것을.


늘, 그대로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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