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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les Blog Dec 16. 2022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지음

북리뷰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그 첫 번째가 이반 일리치가 병을 앓기 전까지의 그의 생활이다. 일리치는 정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말하자면 금수저는 아니라도 은수저 정도는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행동하고, 공부하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의 평판과 인정”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결혼도, 대인관계나, 상급자와 하급자를 다루는 태도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끄덕일 만큼만 관용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맥들로 이루어졌다. 


이반은 춤을 좋아하지만, 춤은 그저 사교의 한 기술로서만 이용될 뿐 즐기지 않는다. 결혼은 나이가 차서, 자신과 잘 어울릴 만한 가문의, 얼굴도 예쁘고, 지참금도 좀 가져올 수 있는 재력이 있는 여자와, 남 보기에 좋고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인정받는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바가지를 긁는 아내, 자주 아픈 아이, 쪼들리는 경제생활과 부인의 낭비벽 등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반은 이에 가정생활을 제대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결혼 전의 자유로움을 갈구하며, 직장생활에 매진함으로써 지겨운 결혼 생활의 탈출구를 찾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반 일리치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부르주아 계층의 누구나에게 해당될 정도로 평범하다. 평범하다는 것은 죄의식이 없고, 당연하고, 심지어 보기에도 좋은 상태인 것이다.


이 책의 두 번째 파트는 이반 일리치가 가벼운 낙상으로 인해 옆구리를 다쳤을 때부터 그 증상이 점점 악화되어 죽음으로 가는 동안의 느낌을 그린 것이다. 너무나도 하찮은 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을 찾아 의사와 상담을 할 때에도, 의사의 가식과 기만 때문이라기보다는, 비관적인 결과를 내포하고 있는 대화의 내용을 무시하거나 회피한다. 죽을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민간요법을 찾아다니고, 이름난 의사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가 두려움에 빠져 죽음을 부정하다 가까워진 본인의 죽음에 분노한다. 남들이 보기에 평탄한 삶을 살았던 본인에게 이런 일이 생길 이유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와 딸아이가 자신을 대하는 데면데면한 태도는 이반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고통과 불안을 함께 하지 않는 점에 대해, 그리고 불쌍히 여기거나, 병실을 함께 지키지 않고, 놀러 가는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하며 화를 낸다. 


집안의 하인인 게라심과 막내아들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동정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어느 순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무서운 죽음을 기다린다. 


세 번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반 일리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병상에 누워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과거의 삶을 회상하게 되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삶은 풍요로웠다. 그러나, 자신이 남의 기대대로 살기 시작한 이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삶 다운 삶을 산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실패작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그는 괴로움에 빠졌다. 


죽음을 맞이할 때는 자신도 이 죽음의 절망에서 벗어나지만, 죄 없는 가족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가족들을 힘들지 않게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고 느낀다. 결국 이 세 번째 관점이 톨스토이를 위대한 작가로 만든 것이다. 


삶을 반추하는 이반 일리치는 분명 삶을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가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하고, 그 반성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죽음이라는 해방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미움과 원망도 모두 벗을 수 있었다.


급작스런 죽음으로 마감하게 되는 이반 일리치의 일생은 허무하기 그지없다. 이는 톨스토이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이 일 년 이후를 계획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말하지 않았나. 가벼운 부상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수 있나? 


이반의 허무한 죽음은 그의 삶의 궤적과 대비를 이룬다. 오로지, 철저하게 사회적 지위와 평판, 돈과 지위를 위해서만 살아온 그였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였나? 


그의 주변을 보자. 조의를 표하러 온 친구들은 브리지 게임에 더 혈안이 되어 있고, 이반의 죽음은 누구에겐 승진의 찬스일 뿐이었다. 이반의 부인도 미망인의 연금을 다 알아보고 딴생각을 한다. 이반에게 다른 이들이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위한 도구였듯이 그들에게 이반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반대로 게라심은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었다. 죽어가는 일리치를 진심으로 동정하며 그의 저승길을 외롭지 않게 지켜준다. 일리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인물이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Crash라는 영화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매사에 짜증스럽고 불만이인 Jean (산드라 블럭)은 강도에게 자동차를 날치기 당한 충격으로 불안에 떨고 있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다. Jean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친구도 아니고 남편도 아닌, 멕시코계 가정부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어찌 보면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찬 삶을 반성하고 주위를 용서하라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혹은, 타인의 시선과 부러움으로 나의 행복을 재는 현대인들에게 '다 부질없어'라고 말하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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