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ok diary jenny Aug 11. 2021

[픽션 5] 세상 가장 겸손한 나의 제자, 겸손한 K

너의 마음 아픈 겸손을 적어도 나는 사랑해



겸손해야 해요. 사람은 겸손해야 해요. 입에 발린 그냥 말하는 겸손이 아니라 정말 제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겸손해야 해요. 겸손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겸손하지 못하면 그동안 쌓은 노력을 다 날릴 수 있다고 그러잖아요. 상대방이 뭐라고 하던 내 생각을 거들먹거리는 건 겸손의 최대 적이에요. 겸손하지 않게 행동해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걸 직접 봤다니까요. 겸손한 척이라도 하면 사람들이 그래도 떠나가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겸손은 해 볼만 한 것 같아요. 웅크리고 꽉꽉 누르고 있는 힘껏 찌그러뜨리면서 최대한 폭을 좁히면 겸손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나마 대우를 받을 수 있어요. 이제 겸손에 대해 확실히 알아요. 항상 겸손에 대해 명심하고 있어요. 겸손해야 해요. 다들 나보다 잘났기 때문에 겸손해야 해요. “사람은 높낮이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거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거 알죠? “내가 나에게 소중하면 남도 자기 자신에게 소중하다.” 그거 윤리문제에도 나왔잖아요. 남을 아껴주고 나를 찌그러뜨리면 거기서 겸손이라는 게임은 끝이에요.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건 사실 나만 겸손하며 찌그러뜨리면 돼요. 겸손 그거 진짜 쉬워요. 까짓것 겸손하면 되죠. 겸손해야 해요. 정말 겸손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고요. 남이 얘기할 때 난 겸손하기 위해 입을 연 적이 없어요. 그냥 겸손하게 가만히 있어요. 경청이라는 걸 하면서 겸손하게 있으면 돼요.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겸손하게 기억해요. 하루 종일 겸손을 명심한다고요. 뭘 보든 뭘 하든 겸손한 자세로 꼼짝없이 여기 지키고 있으면 돼요. 사람은 겸손한 만큼 그나마 대접받을 수 있어요. 받아들이는 자세야 말로 최고의 겸손이라는 말 알잖아요.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상대방에게 고운 말 쓰고, 상대방에게 부드럽게 대하라” 사실 겸손한 저에게 그 말은 엄청 웃겨요. 겸손하려면 귀를 막아야지 왜 기울여요. 겸손하려면 입을 닫아야지 왜 고운 말이랍시고 말을 해요. 부드럽게 대하다니 겸손하지는 못할지언정 어디 감히 누구를 대한다는 거죠? 그게 겸손의 최고봉이라니 믿기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 특히 가족에게 겸손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겸손해야 해요. 진짜 겸손해야 해요. 겸손하려면 눈을 쫙 내리세요. 아뇨, 눈 감는 건 겸손이 아니죠. 겸손하려면 고개를 팍 숙이세요. 목을 좀 더 앞으로 쭉 빼고 숙여야 겸손한 거죠. 어깨를 겸손하게 좁히세요. 확 움츠리면서 좁혀야 겸손해 보이죠. 최대한 내가 겸손하다는 걸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겸손이 그렇게 어려워요? 노력하면 겸손할 수 있어요. 세상은 내가 겸손해야 나에게도 기회를 준대요. 사람들은 내가 겸손해야 내 곁에 있어준대요. 겸손해야 해요. 나는 진짜 겸손해요. 근데 더 겸손해야 한대요. 겸손할 수 있어요. 겸손은 미덕이다 그 말 알죠? 겸손해야 해요. 나는 겸손해요. 나는 정말 겸손해요. 이렇게 겸손한 내가 요즘 기분이 좀 이상해요. 내가 겸손하면 기회를 준다더니 나는 또 뺏긴 것 같아요. 내가 겸손하면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준다더니 나는 또 혼자가 된 것 같아요. 겸손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겸손했어요. 아직도 더 겸손해야 하나 봐요. 겸손은 미덕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겸손이 부족해요. 겸손은.......... 겸손은.........



그래, K야. 알겠어. 너는 아직 겸손이 부족하구나. 네가 생각했을 때 네가 좀 더 겸손해졌다 싶으면 그때 선생님이랑 다시 이야기 나누자. 더 겸손해질 너를 언제 어디서든 선생님은 기다릴게. 나는 어디 가지 않아. 항상 여기에 있어. 알지? 더 겸손해질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겸손한 너의 모습을 보는 게 나의 일이니까. 조금 더 겸손해지면 선생님에게 다시 연락해. K야, 겸손은 네 존재의 증명이야. 겸손한 너를 선생님은 사랑해. 우리 또 만나. 꼭 다시 만나. 딸그락.  



 『이름: 나의 제자 겸손한 K. 나이: 당시 16~18세. 상황: 아버지의 잦은 폭력(피멍, 탈모 등)과 어머니의 폭언(인격모독, 가치관 혼란 등) 등으로 인한 오랜 기간 정신적 외상. 특징: 말할 때마다 겸손이라는 단어를 반복 강박적으로 사용.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틱장애. 만화 판타지 과몰입. 하루 수면시간 12시간. 외모: 작고 마른 체형에 어두침침한 표정 그러나 아기 같은 말투와 천진난만한 미소 가끔 지음. 고등학교 졸업 불가. 현재 34세. 연락두절.』  

 


“보고 싶은 나의 제자 겸손한 K. 너의 고결했던 그 겸손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적어도 이 세상에서 나 하나는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어. 보고 싶은 나의 제자 겸손한 K. 널 많이 사랑해. 언젠가 만나서 너의 그 겸손에 대해 더 듣고 싶구나. 잘 지내.”



작가의 이전글 [육아]from입짧러깨작러 to냠냠러쩝쩝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