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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diary jenny Aug 18. 2021

[픽션8] 행방불명된 돈을 찾아서, 배고픈 K 이야기

행방불명된 돈 100만 원, 100만 원, 100만 원, 그 돈.




오늘 고백을 하려고요. 고백이라기보다는 그냥 넋두리예요. 저의 잘못으로 그 사람들은 제 곁을 다 떠났어요. 정말 좋은 사람들인데 제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할 말은 있어요. 사람이 그렇잖아요. 너무 힘들면, 너무 살기 힘들면, 처박힐 구석이 더 이상 없으면 그렇게 되잖아요. 네? 다들 그런 건 아니라고요? 그렇죠, 다 그런 건 아니죠. 하지만, 제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요? 네? 아직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요? 알았어요, 반성합니다. 오늘 고백을 하려고요. 고백이라기보다는 그냥 넋두리예요. 저의 잘못으로 제 고등학교 동기 한 명은 제 곁을 떠났어요. 지옥 같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당장에 취업 자리를 알아본 저는 어느 조그맣고 더러운 정체불명의 사무실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다단계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던 때였어요. 19살이 그런 걸 아나요. 설명도 없이 그저 물건을 떠넘기고는 다 팔아오라고, 그러면 돈을 준다고 하길래 그러면 되는 줄 알았어요. 아는 사람에게 먼저 팔아라고 하더라고요. 이럴 때 제일 편하고 만만한 게 친구잖아요. 친구다운 친구가 없던 저는 고민을 했죠. 어떻게 몇몇 연락처를 긁어모아 전화를 했죠. 친구들에게 무작정 사라고 했어요. 당연히 못 팔았어요. 신입생 환영회인지 뭔지 놀러 다니기 바쁜 그 애들은 말 그대로 화려한 대학생이었어요. 뻔할 뻔자 영화를 보는 데는 만 원짜리를 척척 써도 내가 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물건은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그중 착하고 만만한 애가 한 명 있었어요. 먹이를 찾은 저는 그 애에게 집중 공략했어요. 그 애는 특유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더군요. 하긴 친한 적도 없는 내가 갑자기 다가서니 당황스러웠겠죠. 싸구려 옛 추억을 팔아먹으면서 사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100만 원짜리 물건을 팔아치웠어요. 스무 살에게 100만 원의 싸구려 옥매트를 팔았으니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요. 병신 같은 너, 네가 이게 왜 필요하니. 하지만 그렇게 착한 애도 저에게 나쁜 년 욕을 하고선 떠나갔어요. 오늘 고백을 하려고요. 고백이라기보다는 그냥 넋두리예요. 저의 잘못으로 그 친구가 제 곁을 떠났어요. 그리고 몇 년 후 이사를 했어요. 상황은 계속 나빠져서 더 찌그러지고 비뚤어진 곳으로 가게 되었죠. 그 동네에서 사업수완 좋은 한 언니를 알게 되었어요. 그녀에게서 역시나 다단계 비슷한 걸 배웠어요. 네, 배웠어요. 배가 고파서 배웠어요. 배를 채우기 위해 배웠어요. 배가 고파 죽겠어서 배웠어요. 배는 채워야 살 것 같아서 배웠어요. 빌라에 저랑 동갑인 꾀죄죄한 여자가 살았어요. 좀 모자란 여잔데 늙은 엄마가 한 번씩 와서 돌봐주더군요. 그 애에게 살살 접근했어요. 얼마나 병신처럼 순진한지, 제 얘기를 전부 믿더라고요. 하, 그런 여자는 처음 봤어요. 너 돈 얼마 있니 물으면, 얼마 있는지 보여주는 그녀였어요. 그 꾀죄죄한 여자에게 100만 원짜리 물건을 팔았어요. 25살 모자란 여자에게 이름도 없는 출판사의 어린이 명작동화 세트들을 판 후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아이도 없는 네가, 결혼도 못할 네가 이게 왜 필요하니. 하지만 그렇게 모자란 여자도 저에게 나쁜 년 욕을 하고선 떠나갔어요. 오늘 고백을 하려고요. 고백이라기보다는 그냥 넋두리예요. 저의 잘못으로 그 여자가 제 곁을 떠났어요. 그리고 몇 년 후 결혼을 했어요. 어쩌다 보니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었어요. 상황은 시궁창 같았죠. 무능력한 그 남자를 따라 변두리 후진 곳으로 갔어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그 불쌍한 사람은 자기대로 바쁘고 저는 저대로 정신없었어요. 남편은 어디선가 물건을 떼어 왔어요. 출처가 어떻게 되는지, 원래 가격은 얼만지 전혀 모르는 싸구려 물건들이었죠. 동네에 마을 회관이 하나 있었어요. 곧 귀신이 될 것 같은 할머니들이 날만 새면 와서 노는 곳이었어요. 하루 종일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그날이 그날 같은 지겨운 곳이었어요. 할머니들에게 살살 접근했어요. 저보고 딸 같다나요. 그중 한 할머니가 저만 보면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잡아주더라고요. 세상에서 곧 사라질 것 같은 할머니의 손에 수지침 세트 하나를 올려주고는 피 같은 100만 원을 챙겼어요. 눈앞이 어른거리는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수지침이라니. 조잡한 설명서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아니, 글자 자체를 읽지도 못하는 까막눈 할머니에게 가짜 수지침 세트를 팔았으니 그 당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어이구, 불쌍한 할머니. 가족도 없는 당신이 이게 왜 필요하니. 그렇게 마음씨 고운 할머니도 저에게 나쁜 년이라는 욕을 하고선 떠나갔어요. 오늘 고백을 하려고요. 고백이라기보다는 그냥 넋두리예요. 저의 잘못으로 그 할머니가 제 곁을 떠났어요. 그리고 또 누가 있었나, 모든 기억을 파헤쳐 봤어요. 아무리 내 머리가 병신같이 나빠도 생각나지 않더군요. 다행히 이게 전부네요. 믿기지 않는다고요? 거짓말이 아니라 이게 전부예요. 진짜예요. 이게 전부예요. 저는 지금 어느 요양원에 있어요. 요양원 이름은 뭔지, 몇 호실에 있는지, 언제 들어왔는지 전혀 몰라요. 제가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 지도에서 어디쯤 인지도 몰라요. 누군가에게 이끌려 여기 왔는데 그게 누군지도 모르니 답답하네요. 내 몸 어딘가에 병이 생겼대요. 그게 퍼져서 온몸이 썩어 가고 있대요. 배가 고파서, 고픈 배를 채우려고 이것저것 마구 먹어서 병이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 진짜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 나쁜 년이 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배가 너무 고팠어요. 지금 나는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건강한 몸도 없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여기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내 정신은 오락가락거리는 중이래요. 나를 병신 취급하네요. 내 눈에는 자기들이 더 병신 같은데 말이죠. 오늘 마지막 고백을 하려고요. 고백이라기보다는 그냥 마지막 넋두리예요. 저의 잘못으로 그 사람들은 제 곁을 모두 다 떠났어요. 싹 다 떠났어요. 네, 마음이 안 좋아요. 나쁜 년이라는 말이 귀에 맴도네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이게 너무너무 궁금해요.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던 건데 진짜 묻고 싶어요. 어디 물어야 할지 여기 물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진짜 물어보고 싶어요. 물어봐도 되죠?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제가 나쁜 년 소리를 들으면서 얻어낸 그 돈 100만 원, 100만 원, 100만 원 그 돈. 세 번의 100만 원 그 돈. 어디 있나요? 제 동창에게, 빌라 여자에게, 동네 마을회관 할머니에게 받은 100만 원, 100만 원, 100만 원 그 돈. 세 번의 100만 원 그 돈. 어디 있나요? 그 돈 어디 있나요? 진짜, 그 돈 어디 있나요? 그 돈, 있는 건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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