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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Oct 27. 2021

스며들다



 최근 재미에 들인 것이 수채 캘리그래피이다. 원래는 그림을 배우고 싶었다. 뒤늦게 그림책을 좋아하게 되다 보니 그림이라는 매체의 매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사실 그림에 내가 호기심을 가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엔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단정 짓고 살았기에 아예 그쪽 분야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래도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무슨 이유인지 어느 날 물감과 붓, 그리고 스케치북을 문구점에서 사가지고 와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있다. 붓이 영 손에 익지 않아 하얀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은 어디 내놓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그 순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이끌려 했던 행동은 내 안의 작은 숨 하나를 트이게 했다. 생명을 품고 있던 그 시기, 내 안의 어떤 감성이 폭발해서인지 나라는 사람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일러스트나 수채화 강좌들이 눈에 띄었다. 많은 부분이 온라인화되어 가고 있지만 사람들의 감성은 더욱 결핍을 느끼고 아날로그적인 것을 찾게 된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왔던 나 또한 끌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음먹고 등록하려고 하면 다 수강 마감이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수채 캘리였다. 그림보다는 쉬워 보였고, 그림을 배우기 전에 경험해 보면 좋을 듯해서 바로 신청을 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경험은 나를 낯설게 보는 시간이 된다. 코로나로 강사님부터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앉아 있어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호기심과 동기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 때 쓰던 수채화 물감과 팔레트,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붓을 들고 참여했다. 


 캘리그래피는 글자를 모방해 따라 쓰는 것인데 수채 캘리는 글자 옆에 수채화를 살짝 곁들인다. 수채화를 어릴 적 분명 배웠을 텐데 남아있는 기억이 전혀 없다. 하나하나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수채는 물과 물감의 여러 색의 조합을 미묘하게 이용하는 기법이다. 종이 위해 한가득 뿌려진 물속을 유영하는 서로 다른 색은 날카로운 경계를 지우고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며 또 다른 색을 창조해낸다. 


 캘리는 붓을 이용해 좋은 문구를 다양한 글씨체로 그리는 작업이다. 요즘 캘리 기법으로 쓰인 드라마 제목도 종종 눈에 띈다. 글씨체를 따라 쓰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필체를 발견하고 창조해 예술작품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 캘리그래피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지만, 여러 색감이 조합된 수채를 곁들일 때 더욱 멋들어진 작품이 만들어진다. 


 강사님이 보여 주시는 대로 하면 금방 따라 쓰고 그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내 손은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 내 몸을 온전히 통과하지 않은 경험은 진짜가 아님을 여실히 깨닫는다. 아직은 글과 그림을 모방하는 훈련의 시간이지만, 이 시간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나만의 글씨체와 그림이 탄생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초심을 다잡는다. 수없이 획을 긋고, 색을 섞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보통은 차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그렇게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날따라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차 밖을 나와 아파트 단지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청명하고 파란 하늘이 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멋들어지게  사이사이에 퍼져있는 구름은 예술이었다. 하늘과 구름에 반해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늘은 마음껏 자신을 내어주며 너의 솜씨를 펼쳐보라고 구름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파란 바탕에 구름이 휘갈겨 쓴 그림들은 가슴 설레게 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온통 책과 문장으로만 뒤덮인 나의 한 SNS에 짧은 글을 입힌 사진들을 만들어 올렸다. 그리고 하늘과 구름 사진에 내 얼굴을 입힌 동영상까지 만들어서 말이다. 



 너는 정말 파랗구나. 

 너를 닮고 싶은 나. 

 너에게 물들고 싶어. 



 내가 생각해도 살짝 유치한 듯하지만,  과감히  SNS에 올렸다. 그 뒤로 나처럼 하늘 구름을 찍은 사진들이 수없이 피드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근 나는 왜 수채와 하늘에 반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 둘의 공통점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선이 애매하다. 내 것 네 것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수채화는 물을 통해서 색과 색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들도록 한다. 그로 인해 다양한 색감의 멋을 창조한다. 자기만의 색감과 특성이 있음에도 섞이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광경은 황홀감 그 자체다. 하늘도 경계가 없다. 파란 바탕에서 구름은 마음껏 자신만의 기량을 자랑하듯 정체되지 않은 수없는 모양들을 초 단위로 만들어낸다. 


 지나고 보니 나는 경계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굳이 가까워질 거 같은 사람에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들이고 싶지 않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왜 나는 그토록 선을 지키려 했을까? 내 기질이 한몫 했을 수도 있고, 상처로 만들어진 벽이 스스로 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여리고 상처 많았던 내면의 나에 대한 연민을 지키려면 굳건히 문을 지켜야 했으리라. 내면의 공허, 약함,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이면의 결핍이 스스로 나를 꽁꽁 싸매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고, 나에 대한 성찰을 해 가고, 세상이 주는 선한 것들을 채워가면서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온다. 그렇게 꽉 너를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이제 조금씩 그런 나를 알아채고, 놓아주고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지킴이 너무 강해서 타인이 도저히 침범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곽과 같다면 섞임으로 인한 감동과 황홀감을 경험할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나이와 직함으로 위계질서가 강한 나라다. 밀레니얼 세대들이 조직에 편승하면서 그러한 문화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지만,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 호칭에 이러한 문화가 여전히 많이 담겨 있다. 단일민족의 정체성도 이런 선 긋기에 한몫한다. 다문화 사회, 세계화, SNS로 초연결 된 세상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대와 성, 피부색, 물질, 학벌, 정치 색깔 등으로 서로를 혐오하며 벽을 쌓는 일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최근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핫하다. 수많은 컴퓨터 게임 콘텐츠 성격의 비슷한 영화와 드라마로 사람들이 식상할 즈음에 우리나라의 전통 놀이와 게임, 기생충의 부와 가난에 대한 메시지가 섞이면서 신선함을 사람들에게 안겨다 주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의 미묘한 섞임 속에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여운과 생각거리를 안겨다 주고 있다. 창의성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닌 연결에서 온다. 4차 산업혁명 새로운 시대적 변화의 한 가운데서 선긋기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섞이고 스며들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사는 길이다. 


 자연 가운데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있다면 어찌 감동을 주겠는가. 자신의 색만의 최고라고 주장한다면 어찌 명작이 탄생하겠는가. 인간도 혼자 고고한 척 서 있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고, 스며듦의 미학을 경험하지 못하리라.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경계를 짓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공저 수필집 <울음을 풀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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