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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Oct 27. 2021

골목길 놀이터



 예술평론가이자 문화평론가인 리베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라는 책에서 “무엇이든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 던 장소는 그 감정의 일부에 새겨 넣어진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장소의 기억을 되찾으면 그 감정을 되찾게 되고, 가끔은 장소를 재방문하고서야 비로소 숨었던 감정이 드러난다.”라며 장소가 감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가끔 차를 몰고 어릴 적 살던 동네 근처를 지나치게 된다. 평소엔 그냥 지나쳤는데,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뛰어 놀던 골목으로 차를 운전해 가고 있었다. 약간의 호기심과 무의식의 그리움이 나를 그리로 인도했던 것 같다. 아니면 뭔가 추억을 발판 삼아 지친 일상을 위로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없어졌을까. 조금은 변해 있을까. 


  내 기억 속의 그곳은 몇몇 집이 약간 수리를 한 것 외에는 다행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집은 골목을 한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집들이 늘어선 곳 중 하나였다. 다시 찾은 그 골목길은 매우 작아 보였다. 어릴 때 그렇게 커 보였던 그곳이 이제는 자동차 하나 겨우 지나갈 공간이었다. 집과 대문은 그대로였고, 담벼락과 바닥도 그때 콘크리트 회색빛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그 골목길 한가운데 그리고 내가 살던 집 대문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차 안에서 밖을 두리번거리며 오랜 시간 살펴보았다. 내가 살던 장소에 있으니 그 시절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그 기억들에 묻혀있던 감정들도 올라왔다. 그리고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그때 그 감정의 공기를 마셔보았다. 


  여름이면 밤 10시가 되도록 아이들은 가로등 밑에서 고무줄, 얼음땡 등 갖가지 놀이를 하며 위아래 골목길을 뛰어놀았다. 한밤중에 아이들 목소리가 가득하더라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길 한쪽 옆에 돗자리를 깔고 집집마다 아이의 엄마들이 나와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겨울이면 온 동네의 눈을 쓸어 모아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가끔은 둘로 나뉘어 각 집 옥상에 올라가 패싸움을 했다. 


  낮이건 밤이건 내가 살던 그 길에는 하교 이후에도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로 늘 바쁘셔서 부재하셨지만, 그 길의 아이들로 인해 덜 외로웠던 것 같다. 지금의 놀이터와 같이 좋은 시설 하나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었지만, 돌아보니 그 공간은 나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고 따뜻했던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 그때 그 골목은 우리에게 온 아이들을 품어줄 만큼 넓고 컸다. 그 골목길 놀이터는 나에게 엄마 품과 같은 존재였다.  


  아들이 일곱 살 때, 놀이터에 자주 내보내 친구들과 놀게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도 학원보다는 놀이가 중요하다며 하교 후 놀이터에 함께 나갔다. 그런데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 만나기를 며칠 실패하고 놀이터에 나가기를 포기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놀이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놀이 봉사단을 따로 구성했고, 전통 놀이를 경험하기 위해 주말 오후 시간에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지를 보내왔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에는 ‘모든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놀 권리가 있다’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 아이들이 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참으로 씁쓸했다. 


  지금의 아이들은 사이버에서 주로 논다. 코로나 이후 시대를 살아 있는 우리는 더욱더 온라인에 머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에 우리는 적응해야 가야 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고, 거기서 교감이 일어나고, 불꽃이 튀고, 때론 거친 싸움도 일어나는 그때가 그립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에서는 상처 많은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해야 사는 여자, 부모 없이 자폐아 형을 돌보며 무거운 짐으로 자신의 감정을 꼭꼭 닫아두어야 사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여자는 “나랑 같이 놀자”라는 말로 끊임없이 남자에게 구애하고, 남자는 자신의 ‘놀고 싶은 욕구’를 인식하지만, 현실의 책임감에 그 구애를 거부하며 물러선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은 끊임없이 놀고 싶은 욕망을 억압해야 했던 남자를 두드린다. 여주인공의 “나랑 같이 놀래?”라는 요청은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왜 어릴 적 골목길에 들어섰을까? 내 안의 놀고 싶은 어린아이가 놀지 못하는 어른이 된 몸에 갇혀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은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하는데, 빠른 속도의 우리네 삶은 아이도 어른도 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것이 장애를 일으키고 그렇게 아파 하는 것 같다. 아이나 어른이나 놀지 못하는 시대,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길어진 수명과 기술의 발달로 여유가 생긴 세상 속에서 ‘잘 노는 것’은 이제 어른들에게도 과제가 되어 버렸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다양한 놀이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의 상상을 넓혀주고, 생각지 못한 창의성을 발견하며, 계속해서 꿈을 꾸고, 정신과 육체를 맑게 해 줄 그런 공간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함께 놀 사람들을 구하고, 잘 놀 방법을 궁리해봐야겠다.


공저 수필집 <울음을 풀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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