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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Oct 27. 2021

엄마의 수술



 우리 남매는 딸 셋, 아들 하나이다. 딸들은 명절이면 시댁을 모두 다녀 오고난 후 친정에 들린다. 팔순이 다 되어가는 엄마는 여전히 음식을 장만하시느라 분주하시다. 딸들은 친정에서만은 엄마가 오롯이 해 준 음식을 염치없이 받아  먹는다. 친정에서만큼은 노동을 최소한으로 하고 뒤처리만 돕는다. 그래도 이번 명절에는 나이가 들어가시는 엄마의 체력을 생각해서 음식을 사 먹거나 만들어진 음식을 사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엄마는 명절 재료들을 다 장만해 놓았고, 아직까지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하신다. 


  나는 워킹 맘으로 살아온 삶을 핑계 삼고, 실제 에너지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살림에 영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가끔 욕망이 솟구치면 그때만 반짝 이런 저런 요리를 해 댔다.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해주는 것을 당연한 듯 받아 누리며 살았다. 명절에는 남녀의 불평등한 노동의 현장을 바라보며 일부러 덜 동참했다. 


  그런데 명절 하루 전날에 친정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의 한쪽 눈이 안 보여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큰 병원에 가서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실명이 될 수 있는 응급 상황이라고 했다. 다행히 동생이 서울 큰 병원에 근무해서 급히 예약해 다음 날 새벽 바로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수술은 잘 되었고, 집에서 치료가 완쾌되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나, 명절은 보내야 해서 딸들은 외식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사다놓은 재료들이 쌓여 있기에, 고민 끝에 음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딸들이 본격적인 음식 노동에 참여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정이었기에 딸들만의 손길로는 부족했다. 온 손자들과 남편까지 합세했다. 남자들은 전을 부치고, 그 옆에서 아이들은 새우도 손질하고, 마늘도 까고, 도라지도 두들겼다. 처음 보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남편에게는 당신이 첫째 사위니깐 첫 설거지는 무조건 당신이 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온 가족이 뭉치니 3시간 만에 준비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을 먹으며 괜스레 친정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친정이라는 핑계로, 딸들을 대신해 그동안 엄마는 이 모든 일을 홀로 며칠에 걸쳐서 감당하신 것이다. 엄마가 수술 정도는 해 주어야 온 가족이 움직이구나라는 것에 죄송한 마음이 올라 왔다. 아마 내년 명절에 몸이 회복되면 엄마는 또 본인이 손수 다 감당하실 것이다. 


  엄마는 사실 평생 노동을 하며 사셨다. 아버지와 함께 생계를 책임지시느라 우리가 어릴 때에도 저녁 늦게야 집에 들어오셨고, 들어와서도 쉬지 못하시고 네 아이의 끼니를 챙겨주셔야 했다. 성실하시기에 몸 관리를 잘하시지만, 그래도 엄마의 관절과 몸은 성한 데가 없다. 평생을 일해 닳고 닳으셨다. 어릴 때, 우리에게 늘 100원에 몸 이곳 저것을 안마하도록 시키셨다. 내 안에는 엄마의 그 노동에 감사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한편에 있었다. 여성에게 부과된 과한 노동에 저항하면서도 딸로서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딸이었다. 


  누군가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을 말끔히 해 놓는 것을 그저 먹고 누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노동이 고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모시키는지 잘 모른다. 해 본 사람만 안다. 명절마다 수면 위에 오르는 여성들의 소외된 노동은 여전히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한 사람의 노동 속에 희생과 헌신의 기쁨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은 그 사랑을 먹고 산다. 하지만 희생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책임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넘기는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희생과 정의의 가치는 여전히 내 안에서 충돌한다. 나는 내 몸 안에 부딪치는 이 모순을 아직 해결하지는 못했다. 나만의 노력으로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의 수술로 인해 펼쳐진 명절의 풍경 속에서 새로운 상상을 해 본다. 명절에도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먹고 웃으며, 노동하고 경험을 나누는 추억의 시간이 되기를 말이다.


공저 <울음을 풀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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