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_루리

긴긴밤을 견디게 하는건 나와 함께 있는 너, 그렇게 생겨난 우리

by 시티오브

출판사: 문학동네

평점: ★★★★☆


XL

어른도 동화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루리 작가는 "어린이들의 고민과 어른들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2023. 5. 9. 동아일보 인터뷰 中)

어렸을 때 봤던 동화나 만화는 어른이 되고 봐서도 재밌다. 어른인 상태에서 보면 어릴 때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속속들이 보인다. '어릴 때는 그냥 흥겹게 따라 불렀던 만화영화 ost 가사인데, 어른이 되고 나서 보면 그 의미가 느껴진다. 어릴 때는 나쁘게 느껴졌던 고길동 아저씨가 이제는 정말 착한 사람으로 보인다' 등등


그래, 그리 쉽지는 않겠지. 나를 허락해준 세상이란. 손쉽게 다가오는 평화롭고 감미로운 공간이 아냐.

<butterfly(디지몬 어드벤처)>


루리 작가의 동화 <긴긴밤>은 "책을 읽고 오열했다"는 성인 독자들의 후기가 많았다고 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게 바로 동화다. 나에게 루리 작가는 동화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소중한 작가다.

<긴긴밤>의 등장인물들은 전부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긴긴밤을 함께 나아갈 때' 모든 배경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너와 나'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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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 노든의 첫 기억은 가족을 잃은 코끼리들이 모이는 코끼리 고아원에서의 어린시절이다.. 코끼리와 코뿔소는 전혀 다르지만, 코끼리들은 노든을 품어준다. 그 곳에서 할머니 코끼리가 노든에게 하는 말은 이 이야기 전체를 꿰뚫는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p.12


그렇다. 힘든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게 삶이다.

노든은 살아가면서 기댈 수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만난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야생으로 나왔을 때 만난 아내와 딸, 파라다이스 동물원으로 끌려왔을 때 만난 코뿔소 앙가부, 전쟁으로 동물원이 파괴됐을 때 함께 탈출한 펭귄 치쿠.


이들은 노든과 함께 있는 동안 숨을 거두지만, 노든이 '긴긴밤'을 살아갈 수 있게 힘을 불어넣어준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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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펭귄 치쿠는 오른쪽 눈이 다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를 돌봐준 절친 펭귄인 윔보는 치쿠와 함께 알을 품었다. 그 알은 흰색 바탕에 검은 점들이 있어 모든 펭귄들이 기피했었지만, 윔보와 치쿠는 알을 거둬들였다. 윔보가 전쟁으로 죽고, 치쿠는 알을 바다로 데려가 주기 위해 노든과 함께 여정을 떠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치쿠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다. 노든은 알에 대해 딱히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어쩐지 기분 좋았다. -p. 63


코뿔소와 펭귄, 서로 너무 다른 노든과 치쿠는 '모래언덕을 지나고, 가시 박힌 덩굴을 지나고, 별이 빛나는 더러운 웅덩이'를 지나면서 '우리'가 된다. 그래서 노든은 목소리만으로도, 발소리만으로도 치쿠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수많은 긴긴밤을 지나는 동안 치쿠는 결국 지쳐 쓰러져버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이제 그 알을 바다로 옮기는 것은 노든의 목표가 됐다. 노든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새끼 펭귄은 태어난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까만 밤하늘과 빛나는 별들과, 별들만큼이나 반짝이던 코가 뭉툭한 코뿔소의 눈'을 본다.


그리고 노든은 새끼 펭귄에게 수영하는 법을, 과일을 먹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는 코뿔소의 초록 바다인 푸르른 들판에서 숨을 거둔다. 펭귄의 부리에 코를 맞대면서 작별인사를 건네고, 펭귄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봐 주면서.


노든은 새끼 펭귄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p.99


결국 수많은 이들의 애정이 살게 한 새끼 펭귄은 파란 지평선, 바다에 도착한다. 바다에 도착했지만 새끼 펭귄은 너무나 작았고, 바다는 아름다웠지만 그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도 바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세상은 아름답다지만, 그 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엉망진창이다. 완벽한 삶이란 없고, 각자의 외로움과 슬픔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무도 똑같은 삶을 살지 않기에, 아무도 나와 똑같이 생기지 않았기에 인생은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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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뒷모습만 보고도 '나'를 아는 '너'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간다. 긴긴밤은 매일같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삶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책을 쓴 루리 작가도 아끼는 강아지가 세상을 떠나거나, 가족이 아팠던 '긴긴밤'을 겪었다. 그들은 루리 작가에게는 발걸음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루리 작가는 '상실을 피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다'는 응원을 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


<긴긴밤>에서는 어딘가 불완전한 동물들이 이야기를 이끈다. 뿔이 잘리고 유일하게 남은 북부흰코뿔소인 노든이,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태어난 새끼 펭귄이, 오른쪽 눈이 불편한 치쿠가. 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닮았다.


작가가 출간한 또 다른 동화 <메피스토>에서도 서로 다른 존재인 소녀와 악마가 친구가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고통스럽고 두렵다. 그러나 연대와 사랑, 우정은 특별한 이유없이 어느 순간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나'도 품어준다.


작가는 가장 슬픈 이야기로 가장 큰 따스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보다 더 많은 슬픔을 겪어온 어른들에게 <긴긴밤>은 더욱 큰 위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른 동물들이 서로에게 맞닿아 있는 책 속의 수많은 그림들은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느낌을 들게 한다. 매력적인 동화였다.

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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