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가 다른 핑크_이예진

성장통을 겪고 난 후, 만들어지는 '나의 어설픈 핑크'

by 시티오브

출판사: 문학동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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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한테 자꾸 착하다고 했다 나는 착한 게 아닌데

그간 배운 걸 곧이곧대로 믿었을 뿐인데

나한테 착하다고 한 사람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돼지 삼 형제는 집을 짓기 전에 건축 허가나 부동산 투지 계약에 대해 알았을까 오늘도 전세사기에 대한 기사가 몇 건 올라왔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돼지는> 中



이 세상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착하다, 예쁘다, 멋지다' 그런 말들 속에서 세상을 곧이곧대로 믿은 아이는 성장할수록 세상의 냉혹함 속에서 상처받는다.


'아기 돼지 삼 형제'를 읽고 권선징악에 대해 배운 시인도 그렇다. 그녀는 황금돼지의 해에 태어나 충실하게 아기돼지 삼 형제의 교훈을 믿으며 자랐지만, 자랄수록 '착하면 손해를 입고, 현실적이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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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되어 돌아왔대

...

창문 밖으로

작게 쪼개진 선배들이

반짝이며 흩날리고

<우리 모두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귀를 뚫었다> 中



순수한 소녀들에게 학교 밖 세상은 부서질 것처럼 위험한 공간으로 보인다. 소녀들에게 솔직하게 세상 밖의 일을 말해주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녀는 '세상 밖으로 먼저 나간 선배들이 반짝이며 쪼개진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관해 명확한 답을 얻을 수도 없고, 정해진 답을 말하지 않으면 선생으로부터 "거수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집에 돌려보내주겠다"는 협박을 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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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은 그늘도 없는 옥상에서

나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

<방학> 中



이렇게 정형적인 교육만 받던 소녀가 어느 날 학교 밖에서 바바리맨을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직접적으로 위험을 대면해야만 하는 소녀에게 유일한 편은 언니들.

이 언니들은 소녀의 친언니이거나, 소녀의 또래 친구들, 혹은 자기 자신이다.


어린 시절 모두가 겪은 경험일 것이다. 집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세상은 선과 악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선과 악은 뒤섞여 있어 무엇이 자신의 편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온갖 것들에 관해 함부로 추측해보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속닥속닥해보기도 한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경험에 관해 시인은 서정적인 언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비극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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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아이들과

방과 후의 교실에 앉아

연인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

우리는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묻고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영화부> 中


이예진 시인은 "사랑은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문장처럼 느껴져요. 세상엔 사랑에 관한 문장이 많아서 때로는 내가 쓴 것이 사랑이 맞는지 의심해보기도 하고요."라고 문학동네 인터뷰에서 말했다.


소녀들에게 사랑은 난제다. 기분 좋으면서도, 명확히 얘기할 수 없어 난감하기도 하다. 사랑의 형태는 제각각이기 때문에 해답이란 없다. 소녀들은 서로 사랑에 관해 얘기하면서 성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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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나는 오 년째 같이 살고 있다

평생을 약속한

믿음 하나로

...

술에 취한 미래가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것을 본다

<오랜 미래> 中


어느새 커서 소녀는 어른이 된다. 시 <오랜 미래>에서는 시인이 누구고, 어떤 상황이며,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가 명확히 등장한다. 시에는 '현재, 미래'가 나오는데, 이들은 같이 사는 언니들로 묘사가 되지만 시인 자신을 말한다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언니들은 언제까지나 시인을 지켜줄 것 같았지만, 사실 그 언니들도 세상의 풍파 속에 쓰러져 간 사람들이다. 낭만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변하고, 하루 벌 돈을 위해서 꾸역꾸역 버텨내는 삶.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앞으로 자랄 아이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그래서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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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많은 소녀들의 선배인 시인은, 세상이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비록 그녀가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를 때처럼 용기 있지 않고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말이다.



뿌리 달인 물을 마셨다.

입에 맞지 않아도 군말 없이 온 힘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산행> 中



시인은 자신이 장르가 다른 핑크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꼭 세계를 구할 필요가 없고, 유치한 것이라 해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고, 때로 바보일지라도 남을 위로하고.

이런 수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은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진 여성으로 자라난다고 말이다.



완성하고 나면

나의

어설픈 핑크가

<장르가 다른 핑크> 中



나는 이 시가 여성 화자의 관점에서 쓰였다고 하더라도 남성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충분히 산들바람에도 흔들리는 알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른이 돼서도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남성, 여성' 혹은 무언가의 정체성으로부터 탈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두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설픈 핑크, 어설픈 블루, 어설픈 퍼플'이 언젠가는 만들어질 것이다.



지난번에 문학동네 시인선에서 조혜은 시인의 작품들을 읽었었는데, 그때보다 이 시집이 더욱 와닿았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의 성장을 보는 느낌이라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성장통

누구나 겪어봤던 주제기 때문에 어떤 독자라 하더라도 이 시집을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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