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이야기는 무책임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언어만 남기기 위해 필요함
⭐별점: ★★★★★
⭐출판사: 허블
나는 SF 장르를 좋아한다.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독특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는 장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독서 버킷리스트에 저장해 놓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흘러 읽게 된 책은 내 커다란 기대감을 여지없이 충족시켜 주었다.
책의 표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작가가 무려 12명이라는 것이다. 국내 SF시집 발간을 기념해 SF를 사랑하는 작가들이 모였다. 시인들의 개별 단행본 시집에는 실리지 않은 시들도 있다. 여기에 SF 소설로 유명한 출판사 허블이 편집을 맡았다. 실패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시가 있었던 페이지를 접어두었다. 그리고 책 맨 뒷편에 나오는 작가들의 목록을 보면서 내가 어떤 작가의 시를 인상 깊다 여겼나 찾아봤다. 그렇게 찾은 내 취향의 시인들의 작품을 가볍게 소개하겠다. 본문에는 작가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이, 독자들이 편견에 갇히지 않고 오로지 시 자체를 즐기기를 출판사가 의도한 것 같기도 하다.
<너의 레트로>, <작은보호탑해파리>, <드론과 결혼하기>
<드론과 결혼하기>는 제목부터 충격적인 작품이다. 이 시에서 드론은 세상을 업신여기는 존재여서 '나'를 미물로 만들고, '나'가 추락하며 흩어질 수 있게 만든다. 결혼 행진의 장면을 드론 시점으로 구성한 점이 상당히 재밌게 느껴진다.
약속했었지 리튬으로 재구성된 맹세를 전속력으로 지나가는 거야
내가 오늘 들고 있을 부케는 우주대폭발
사랑은 보통 이성을 뛰어넘는 무언가이기에, 작가들은 과학적인 시어들을 통해 감성적인 무언가를 창조하는 걸 즐긴다. 이성적인 시어와 감성의 모순이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에 나오는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처럼 말이다.
서윤후 작가의 또 다른 시 <너의 레트로>에는 천 년 전의 나를 회상하며 천 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나'가 등장한다.
나에게 천 년 후의 너를 부탁하려고 좋아했던 것들의 목록을 적는다
기포가 듬성듬성 남은 아이패드 보호필름, 지갑에 달린 네잎클로버 아크릴 키링...
우리는 '사는 일에 중독되어' 항상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현재의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가 밤하늘에서 수천 년 전 빛났던 별의 빛을 지금에서야 보듯이, 우리의 삶은 '과거가 곧 현재고, 현재가 곧 미래'인 상태에 놓여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금의 내 고유한 특성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로봇 심장>, <퓨처 로그>, <크런치>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크런치>였다.
<크런치>는 거주 가능 행성을 찾기 위해 발사된 우주선에 타고 있던 사람이 남긴 녹음 메시지로 이뤄진 시다. 그는 냉동 수면을 선택해서 30년에 한 번 깨어나 하루 기록을 남기고 다시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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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30년이 지났다니 믿을 수 없고 우주는 여전히 검습니다 반나절은 몸이 달그락거려서 힘들었어요
이 시에는 자꾸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라는 한 마디만 있는 연이 등장한다. 이 메시지는 점점 더 자주 등장하고, 나중에는 아예 기존의 메시지를 덮어 버린다.
충격적인 전말이 시 뒷편의 각주에서 등장하는데, 사실 녹음 파일이 우주선에 타고 있던 AI가 인간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 가상 일기를 쓰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애초에 이 우주선은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는 작가의 또 다른 시 <퓨처 로그>도 있다. 이 시에서는 인간이 전부 사라지고, 로봇청소기만 남은 도시를 그려낸다.
'인간이 사라진 세상'에 관해 조시현 시인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허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경탄스럽기도 하다.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인간을 따라하며 삶(?)을 연명하는 기계들. 인간의 흔적은 어떻게든 남는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검은 개에 대한 잡문>, <넛셀>, <누군가는 무한 호텔이 무한하다는 사실에 호텔을 찾겠지만>
무한 호텔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누구나 다 들어봤을 것이다. '무한 호텔에 새 손님이 찾아왔는데, 방이 꽉 찼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수학적인 질문에 우리는 '모든 투숙객을 옆방으로 옮겨 빈 방을 마련한다'라는 명쾌한 답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무한 호텔이 무한하다는 사실에 호텔을 찾겠지만>은 호텔직원이 방을 옮기라고 했음에도 옮기지 않은 여자와 그 방에 들어간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자신이 믿는 무한은 그런 게 아니래 무한은 나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한이기에 가능한 것이래
그래, 무한 호텔을 찾는 사람들은 무한 속에서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기에 이곳을 찾은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왜 못했을까? 라고 반성하게 된 시다. 누군가는 무한 호텔에 볼거리가 많아서 이곳을 찾을 수도 있었지만 여자는 의무감에 둘러싸인 과거의 자신을 버리기 위해 이곳을 찾은 걸 수도 있다.
<넛셀>에서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재의 특성을 깨뜨리는 설정들이 등장한다.
'썬데이'라는 단어가 '모든 걸 잊겠다는 뜻'이고, '먼데이'라는 단어가 '무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라는 말이 참 인상적이다.
이 SF 시집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뭘까? 어쩌면 시인들은 세상에 있는 첨언들을 없애고 최소한의 언어들만 남기기 위해 이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사랑, 삶, 친구, 인간' 이런 단어들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덧붙여 있고, 심지어 문법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있다. SF장르는 우주라는 넓은 공간에서 인간을 관찰해 수많은 통념들을 별볼일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하는 장점이 있다.
최소한의 언어. 이성적인 언어들로 표현하는 인간의 감성. 해석은 독자들의 몫.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쓰인 시집이라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