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된 팽나무에 얽힌 거대한 생명의 서사
⭐별점: ★★★★
⭐출판사: 창비
삶과 죽음의 윤회. 작가는 ‘사람’에서 벗어난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이 사는 군산에 있는 600년 된 한 팽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개똥지빠귀 새 뱃속에 존재하던 씨앗이 새가 죽고 땅에 묻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렇게 자란 나무는 수많은 새의 보금자리이자 과실을 내어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됐다. 이 나무는 당산 집이 들어섰을 때도, 일제강점기 때 집이 헐고 주막이 들어섰을 때도 건재했다. 심지어 군산에 새만금 간척 사업이 진행돼 바다가 덮어지고 자연이 파괴됐을 때도 꿋꿋히 그 자리를 지켰다.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생명을 위협받았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모습은 마치 ‘세계수’와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력이 넘쳐나던 나무 주변의 공간은 점점 생명력이 꺼져가는 공간으로 변한다. 서학, 동학 농민 운동으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 되고, 가미카제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청년들이 마지막 밤을 보내는 공간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나무를 둘러싸던 갯벌이 간척 사업으로 메꿔지면서 암흑으로 바뀐다.
나무가 뿌리에서 시작해 가지를 뻗듯,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떠돌이 스님이었던 선대 몽각에서 시작해 후손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마지막 후손인 배동수가 ‘파묻히는 갯벌의 노래를 들었다는 대목’까지, 수많은 자손이 핍박을 받았고 그 와중에도 대를 이을 또 다른 생명을 남겼다. 그래서 팽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전혀 몰랐던 배동수도 ‘귀한 분이 살아있다’라며 나무에 얽힌 생명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마지막 감사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저자는 실제 존재하는 하제 마을의 팽나무를 조사하기 위해 144권의 도서들과 향토자료, 새만금 자료, 철학 및 종교 자료들을 읽었고 자신이 참고했던 모든 2차 창작물에 감사를 표했다. 그만큼, 방대한 ‘생명의 서사’를 쓰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열성을 다한 게 느껴졌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인물들의 행동이 ‘자연’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을 ‘바람의 순교’로 표현하거나, 수많은 사람의 투쟁 역사를 ‘나무에 나이테를 새겼다’로 말한 것도 기억에 오래 남았다. 결국 인간은 자연이고, 자연은 인간이라는 것. 그것이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교 사상’과도 연관이 된다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템플스테이’, ‘귀농’과 같이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요즘 인기가 많은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쩌면 사람들은 보상받고 싶은 게 아닐까.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치열하게 갉아내 왔기에, 자연에서 이것을 되돌려받고 싶은 것 같다.
자연은 아주 잔잔해 보인다. 본문에서 “어린 팽나무는 겨울이 오자 추위에 죽어버린 듯, 메마른 작대기처럼 보였다”라는 말이 나오듯,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봄에 다시금 꽃망울이 맺히듯이, 자연은 생명을 틔워낼 순간을 위해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대를 이으며, 역사에 족적을 남기려 하는 인간의 모습과도 매우 닮아 보인다.
이번 『할매』 발행으로, 황석영 작가가 기록하는 방황과 귀로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삼포가는 길』에서 공사판으로 변해버린 고향으로 돌아갔던 정 씨처럼, 『개밥바라기 별』에서 대학생이 할 수 없는 온갖 직업들을 경험하며 세상의 허무함을 느끼다 과거를 회상했던 준이처럼. 결국 인생은 돌고 돈다는 게 저자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