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닫힌 공간이란
혼모노가 올해 초 3월에 발간돼, 6월 한달 간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연말이 다가온 후에야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왜 그랬냐면 제목이 '혼모노'였기 때문에. 나는 '혼모노'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원래는 '진짜'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지만, 주변인에게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고 한다. 제목이 낯설었기 때문에 집지 않은 책이기도 하나, 막상 읽어보니까 왜 '혼모노, 혼모노'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책 표지에는 풋사과와 다 익은 사과가 반반 그려져 있다. 찾아보니 빨간색의 보색은 청록색이라 한다. 만져보면 풋사과 쪽은 거칠거칠하고 다 익은 사과는 매끈매끈하다. 대비되는 색감과 질감으로 채운 표지. 혼모노에 실린 7편의 단편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듯 하다.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 아니, 진짜와 거짓은 사실 관점 차이 아닐까?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책 표지를 보고 놀랐다. 사실 풋사과든, 다 익은 사과든 결국에 사과다. 진짜와 거짓이 뒤섞인 것이 바로 우리 세계다. 그리고 우리 세계는 구로 이뤄져 있다. 혼모노를 읽다 보면 유독 '구'라는 형태가 많이 등장한다.
나는 영화 볼 때 비하인드나 해석본을 찾아보는 걸 좋아해서 이 책을 볼 때도 하나하나 해석하며 읽었다. 책에는 낯선 예술가들의 이름과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찾아보지 않으면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만하다. 독자들의 리뷰를 보다 보니, '너무 어려웠다, 추천사에 속았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들의 말이 이해가 간다. 이 책은 후루룩 훑어보는 걸로는 제대로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읽는 스타일 때문에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릴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나는 극호였다.
나는 책을 읽다 보니 그의 말이 이해가 됐다. 영화 속 이스터에그처럼 숨은 상징들을 하나하나 찾으며 읽으니 내용이 배로 재밌었다. 그리고 성해나 작가가 직접 추천한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책을 읽으니 마치 앉아서 단편영화 여러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박정민 배우가 말한 대로 책에 나온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있나 싶어서 네이버에 검색까지 했다. 성해나 작가에게 단단히 속았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는 책이었다.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플레이리스트: https://www.instagram.com/p/DSTmW-bk97o/?img_index=2&igsh=YXA0d3prMDVvOXBs
7편의 단편을 관통하는 소재는 바로
이다.
닫힌 공간으로 주인공이 들어가던, 그곳에서 나오던, 혹은 무너져버리건
주인공은 닫힌 공간에 필연적으로 한 번은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공간'이다. 사실 그들이 닫힌 공간을 박차고 나와 열린 공간으로 들어서더라도 진실이 반드시 진실이란 법은 없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소설에 나오는 상징물들을 하나하나 해석하다보면 감이 잡힌다.
SONG: Jan Johansson - Visa från Utanmyra
길티 클럽은 영화 감독 김곤을 좋아하는 골수팬들이 모인 '길티 플레져 모임'을 줄여서 칭하는 말이다. 일단, 죄악과 기쁨이 함께 존재하는 'Guilty pleasure'라는 클럽 이름부터가 의미심장하다.
길티 클럽은 골수팬만 들어올 수 있는 꽉 닫힌 공간이다. 이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김곤의 영화 <인간 불신>이 크랭크인된 날짜를 입력해야 한다. 책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열려라! 참깨'라고 주문을 외쳐야 열리는 동굴처럼 암호가 있다.
이 클럽은 철저히 규칙이 정해져 있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에, 친목질은 절대 금지고, 일부 단어인 '파주 세트, A군'은 절대 사용 금지다. 여기서 금지 단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한 아역배우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둔 것과 연관이 있는 단어들이다. 그의 죄악까지도 감싸주는 찐팬들이 모인 길티 클럽.
이곳에 한때 라이트팬이었던 주인공이 들어온다. 그는 나름 김곤의 작품은 n번 정주행한 팬이지만, 영화 용어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런 주인공을 맞이하는 길티 클럽의 회원인 오영은 "우리의 사랑은 순도 높다"고 말한다. 그리고 회원들이 마시는 김곤의 최애 맥주 '듀체스 드 부르고뉴'
이 맥주는 '와인같은 맥주'라는 별명을 가졌다. 와인처럼 묵직하면서도 신 맛을 띤다. 또, 맥주처럼 청량하다. 이처럼 여러 맛이 섞여 있는 미묘한 맛을 가진 맥주다. 이는 김곤의 양면성, 그리고 길티 클럽 회원들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골수팬 모임이라는 건 외부와 단절된 특별한 공통점을 형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골수팬은 좋은 의미의 홀림이든, 나쁜 의미의 홀림이든 무엇인가로부터 홀림당할 수밖에 없다. 길티 클럽 회원들은 김곤의 파주 사건도 '영화감독이 예술적인 작품을 위해서는 촬영장에서 마땅히 보여줄 수 있는 광기'라며, 그의 나쁜 점까지도 아름답게 포장한다. 진실이 거짓이 되는 길티 클럽이라는 닫힌 공간이다.
주인공은 원래 예술에 도취된 사람들을 불편해했다. 소위 시네필이었던 전 애인이 자신의 예술적 취향과 전문성을 주인공에게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길티 클럽에 들어가서 '광기 어린 애정'에 '길이 들어버린다'. 마치 김곤이 좋아하는 듀체스 드 부르고뉴를 길이 들 때까지 마시는 것처럼.
이 챕터를 읽으며 문득 현대미술에 관한 이슈가 생각났다. 서울대생이 먹은 벽에 붙은 바나나로 잘 알려진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 말 그대로 벽에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다. 이것은 시가 620만달러(약 86억원)에 낙찰됐다. 우리가 봤을 때 '그 정도의 가격인가?' 싶겠지만, 현대미술 팬들에게는 그만한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나 보다. 최근 현대미술계는 네임드 작가들의 작품이 재판매(투자)를 전제로 수백억의 가격에 팔리다보니, '미술시장 경매 과잉 논란'이 일고 있다. 미술품의 가치가 제대로 측정되지 않고 '금액'으로만 판단된다는 것이다. 마치 명품 시장처럼 '골수팬들'이 열광하는 우월 의식과 희소성, 전문성에 기대는 구조다.
챕터에서는 길티 클럽 회원들이 영화의 화면비나 철학성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자 주인공이 멋쩍어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요즘엔 취미조차도 라이트팬으로는 안 되고, 골수팬이어야 한다고. 나 역시도 '문학, 게임, 영화 등' 여러 장르를 찍먹하는 사람이라 전문성은 부족하다. 종종 모임에 참석한 적도 있었으나 전문 용어들과 네임드 있는 예술가들 이름이 바쁘게 오가는 것을 듣고 '나는 진짜 팬이 아닌가' 싶어 머쓱했던 순간도 있다. 그런 순간들이 책을 읽으며 떠올랐다.
주인공은 그들과 닮는 법을 선택한다. 길티 클럽 모임 이후, 김곤 영화의 GV에 참석한 주인공은 그에게 질문할 기회를 얻는다.
그런 주인공의 질문에 김곤은 '별 의도는 없었다'라고 답한다. 그런 후 갑자기 파주 촬영장에서 있었던 가학 사건에 대해 사과한다?! 길티 클럽에서 그렇게 좋은 말로 포장하려고 했던 그 사건에 대해 말이다. 이 일을 떠올리며 주인공은 마치 '허구같았다'고 말한다. 완벽한 감독이라는 길티 클럽이 만들어낸 거짓으로 포장돼 있던 김곤이 진면모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진실을 거짓으로 여기면서 그를 감싸주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믿으며 열광하기도 한다. 콩깍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한다면 그때는 광기가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곤의 작품 이름은 이 사실을 선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인간 불신', '미몽(홀리다)', '안타고니스트(갈등을 유발하는 인물)'. 그리고 길티 클럽의 총대(소위 방장)는 과거 '미몽'이라는 영화의 포커스 풀러(카메라 초점 유지를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김곤에게 홀린 사람인 것이다.
광기와 애정을 넘나드는 모습을 길티 클럽이라는 닫힌 공동체를 통해 표현한 성해나 작가의 표현력이 감탄스러웠다. 그리고...작품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이빨 빠진 호랑이를 쓰다듬는 주인공. 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독자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것이다.
김곤일 수도 있고, 길티 클럽의 회원들일 수도 있으며, 김곤과 길티 클럽의 회원들에게 길들여졌던 주인공을 상징하는 걸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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