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전화번호를 지웠습니다.

나는 가끔 당신을 반려하고 싶다.

by 책꿈샘 김지원

사람들은 저를 보고 완벽한 J나, T라고 말합니다. 노트 정리룰 즐겨하고 다이어리 쓰기를 10년 넘게 잘하니 깔끔하고 계획적인 인간이라고 보는 거죠.

하지만 저는 절대 그런 성향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런 분류에 별 관심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생각이 많고, 덤벙대며, 많은 아이디어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휴대폰 주소록이나 카톡에는 지우지 못하고 떠도는 번호가 수두룩합니다.


새해가 무려 35일이나 지난 어제,

내 인생에서 정리정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저는 휴대폰 번호 지우기에 나섰습니다.


'오!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그래도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삼 년이니깐 지우자!'

'어? 이 번호가 왜 있지?'

'이 사람 누구지?'


혼자 구시렁거리며 번호를 하나, 둘, 셋... 삭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오후에 써야 할 원고가 있어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달려갔습니다. 남편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한참 원고를 쓰는데 조금은 낯이 익지만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옵니다.

'뭐지? 누구지?'

의아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앵? 여. 보. 세. 요! 뭐야?"

“아!! ”

번호의 주인공은 남편이었습니다.


동굴에서 깨서 일어나 보니 갑자기 아내가 사라져서 궁금했을까? 가 아니라

일요일, 같이 동굴에 들어가 잘 줄 알았던 친구가 나오라는 말에 기뻐서 저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신발 신고 콧바람을 쐬고 있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동굴을 벗어나 세상에 나와 신나는 그 목소리에 대고

'제가 방금 당신의 전화번호를 지웠습니다.'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어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잘 다녀오라며, 늦게 들어와도 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덤벙대는 게 죄는 아니잖아!!


저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리던 원고를 내려놓고, 생각에 빠졌습니다.


'왜 지웠을까? '

분명 한 사람, 한 사람, 추억하며 꼼꼼하게 삭제했는데 말입니다.

무의식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의식의 흐름이었을까?


그보다 더 급한 일은 바로 이거였습니다.


결혼 이후 남편의 번호는 "멋진 남편"으로 저장되어 있었죠.


신혼 초, 6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어요.

점심시간에 휴대폰을 두고 잠시 이를 닦으러 갔습니다.

그때 남편이 급한 일로 전화를 했는데 못받았어요.

이 닦고 돌아오니 한 녀석이 아주 해맑은 목소리로 크게 말했어요.

"선생님! 멋진 남편님이 전화하셨어요!"

그때 얼마나 얼굴이 빨개졌는지 모릅니다.


그날 이후부터 17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어요.

결혼 17년 동안 어찌 멋진 남편이기만 했을까요? 순간 이런 자각을 하니 남편 번호를 뭘로 저장하지? 고민이 되었어요.

한 달째 풀리지 않던 원고의 얼개도 끝냈고, 이야기의 막힌 부분도 뻥 뚫렸는데

정작 남편의 번호 저장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네요.

짠한 남편, 나의 동지, 옆지기, 이상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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