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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ehyun Kim Jun 02. 2017

책과 나: 신과 인간의 줄다리기

사람의 아들(이문열)을 읽고

  요즘 같은 시기에 이문열 작가를 언급하는 것은 다소 조심스럽다. 이문열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순수하게 그의 글을 통해 나를 돌아본 것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글이 좋다. 그의 글은 다양한 분야를 다루면서도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 봐야 제깟 것이 소설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소설도 상당 부분 현실의 관찰을 기반으로 한 변형 속에서 일어난다고 믿기에 그의 글에서 묻어나는 향기와 깊이는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소설 「사람의 아들」은 인간과 신을 다룬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신(神) 야훼와 사람의 아들인 인간의 대립과 고민을 담고 있다. 종교적인 글은 대체로 난해한 내용을 담고 있거나 한쪽에 치우친 의견을 담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읽기 쉽다. 어려운 부분은 포기하면 그만인 데다 작가의 생각은 안내판을 따라 걷는 것처럼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문열의 글은 어렵다. 쉬이 꺼내기 어려운 주제를 끄집어 내 대중들의 반발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소설은 민요섭이라 사람이 기도원 인근에서 살해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민요섭을 살해한 자가 누구이며, 이유는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형사에 의해 민요섭의 일생이 드러난다. 원래 민요섭은 신학자를 꿈꾸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신학교를 그만둔다. 형사는 민요섭의 노트를 발견한다. 노트에는 주인공이 ‘아하스 페르츠’인 민요섭의 글이 있다.


  아하스 페르츠는 민요섭의 반기독교적 정서와 고민이 투영된 민요섭의 노트속 인물이다. 존경받는 랍비가 되고 싶은 평범한 소년이던 그는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빈민과, 비참한 삶을 사는 노예,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접하고 신의 존재와 의도에 의문을 가진다. 신은 물질의 결핍으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사는 삶을 사는 빈자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간곡하게 기도하는 노예에게는 여전히 잔혹한 삶이 있을 뿐이다. 야훼는 왜 카인의 재물을 받지 않아 그가 살인자가 되도록 하였으며, 에덴동산 한가운데 사과나무를 두어 인간을 원죄의 굴레에 빠져들도록 했는지 궁금해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쉽게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굳이 구원을 위해 고통스럽고 힘든 조건들을 제시하는 신의 독선과 선에 대한 강요에 실망한다. 


  야훼에게 실망한 아하스 페르츠는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오랜 여행에도 새로운 신을 찾지 못한다. 오히려 신이 없는 세계에 살게 될 고독과 허무가 두려워진다. 논리와 지식으로 신을 붙잡아 보려했던 어리석음을 반성한다. 신은 쫓는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채 아하스 페르츠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의 귀향과 함께 민요섭도 기도원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민요섭을 따랐던 조동팔은 그의 변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씀이 아니라 기적과 물질로 세상을 구할 신이 나타날 것이라 믿었던 민요섭의 변심을 용서하지 못한다. 조동팔은 민요섭을 살해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덮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민요섭이 교회로 돌아왔으니 신과 인간의 줄다리기는 신이 이겼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신은 민요섭이 살해되는 것도 막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신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신의 의도가 무엇이건 피조물인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린시절을 같이한 친한 친구가 있다. 어릴 적 그가 살던 집은 기와를 얹은 양옥집이었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집은 중정과 사랑채가 있었다. 사랑채에는 노부부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결혼한 딸에 손녀까지 있는 대가족이었다. 친구네는 처음에는 노부부네와 잘 지냈다. 친구도 종종 사랑채에 놀러가곤 했다. 


  그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친구는 몇 번 교회를 따라 나갔다. 교회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밥먹기 전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를 길러주고 키워주는 사람은 교회 천장에 붙어있는 하느님이 아닌 바로 진짜 아버지였다. 그가 먹은 쌀밥은 뙤약볕에서 구슬땀 흘려 일하신 아버지가 벌어온 돈으로 마련한 것이다. 친구는 달걀 프라이 하나를 동생과 나눠 주며 당신은 계란 같은 건 싫어한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두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단지 전지전능하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하느님은 깡패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노부부의 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부부 간의 싸움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싸움도 잦았다. 노부모에게 모진 말을 뱉어내던 딸의 입에서 하느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며,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친구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집을 노부부네가 자기 소유인양 말하고 다닌다는 것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부도덕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포용이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이야기해도 된다는 의미라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이후 기독교와 결별했다. 이후 어떤 종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회 뿐 아니라 절, 성당, 마을에 서낭당 근처도 가지 않는다.


  자신을 유일신으로 믿어야 하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하느님의 지독한 이기심은 나도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은 분명 있다. 주말에는 미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한다. 그러나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프레임 안에 있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은 절대 선을 지닌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좀생이일 수도 있다. 평생을 산에서만 살아온 대장장이와 바닷가에서만 살아온 어부가 정의하는 태양은 다르겠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장님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태양은 없어지지 않는다. 분명 신은 있다. 믿는 방식이 다르고 존재를 부정하는 자가 있을 뿐 신은 분명히 있다.


  신과 인간의 줄다리기는 필연적으로 인간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지더라도 기분 좋게 지고 싶다. 신이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평온하게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래야 경배하고 찬양하는 우리 마음이 조금이나마 행복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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