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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배운 입맛

구운 은행과 마른오징어

오늘 하루 수고한 나를 위한 고소하고 짭조름한 사치

by 서이담
우리집에서 나만 먹는 오징어와 은행

어렸을 때부터 오징어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오징어 요리(?)를 섭렵했다. 바싹 마른오징어를 전자레인지에 바삭하게 만들어 먹는 것, 물만 살짝 묻혀 전자레인지에 돌려 부드럽게 먹는 방법, 휴게소에서 파는 보들한 맥반석 오징어, 생오징어를 삶아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 등등 이런 저러한 방법으로 오징어를 즐겼다.


반면 은행은 어릴 적 좋아했다기보단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던 음식이다. 가을날 노란 은행잎은 낭만이었지만 후드득 떨어져서 혹 밟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똥냄새가 붙어 다니는 은행알이라니. ‘그걸 굳이 왜 먹어?’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고등학교 때 우연히 놀러 간 친구네 집에서 친구 엄마가 이쑤시개에 가지런히 꽂아 정성스레 구워 준 은행알은 나쁘지 않았다. 음~이런 맛도 있구나!


술을 즐기지 않는 나지만 가끔 출출해지는 저녁이 되면 뭔가 짭짤한 게 당긴다. 보통 때는 오징어만 구워 먹곤 했는데 어느 날 냉동실에 시어머니가 밥 할 때 넣어먹으라고 주신 은행이 보였다. 그날은 희한하게 고등학교 때 친구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은행 구이가 생각났다. 그래서 은행알 한 줌을 달군 프라이팬에 넣고 속껍질이 살짝 부풀어 일어날 때까지 노릇하게 구워주었다. 아 물론 한 편에는 오징어를 도로록 말려 가장자리 부분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구워주었다.


온 집안에 오징어와 은행을 굽는 냄새가 가득하다. 부엌문, 거실 큰 창문 등 문이란 문은 활짝 열고 환기를 한다. 탄산수에 홍초액을 조금 따르거나 아니면 사이다 같은 걸 꼭 와인을 마시듯 예쁜 유리컵에 따른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넷플릭스에서 찾아 틀어주고 갓 꺼내 아직 많이 뜨거운 오징어를 후후 불어가며 얇게 찢은 뒤 오물오물거린다. 오징어의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구수한 향과 함께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텁텁해진 입을 음료로 한 번 헹구고 나면 이제 씁쓸한 듯 오묘한 은행알 한 개를 입 안에 넣고 씹는다. 어릴 적 싫어했던 그 향과 맛을 이제는 아주 즐긴다.


오늘 하루 수고한 나를 위한 고소하고 짭조름한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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