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과 갑질의 경계에서
남편이 최근에 핸드폰 요금제를 바꿨다. 내 것보다 혜택은 좋은데 가격이 저렴해서 나도 바꿔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앱으로는 자꾸 오류가 나서 요금제 변경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장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일이 몰아치는 바람에 영업점에 갈 시간이 도무지 나질 않았다. 한 달쯤 지나 미뤄뒀던 휴가를 가게 되었다. 쉬고 오는 김에 시간도 나겠다 핸드폰 요금제를 바꾸러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차를 끌고 30분을 넘게 달려 영업점엘 갔다.
코로나 시국이다 보니 건물에 들어가는 것부터도 매우 복잡했다. 자리가 없는 주차장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주차를 하고 체온 측정을 하고선 영업점에 들어갔다. 영업점에 들어가니 또 체온 측정을 했다. 그리고 QR 코드를 찍으라고 해서 QR도 찍고, 아이는 따로 명부를 작성해야 한다길래 명부도 작성했다. 번호표를 뽑고 조금 기다렸다가 내 순서가 왔다.
"100번 고객님~"
내 번호였다. 나는 서둘러 자리로 가서 핸드폰 요금제를 바꾸러 왔다고 이야기를 했다. 직원은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핸드폰 요금제요?"
난 남편을 쳐다봤다. 남편이 요금제 이름을 말하고선 이거 개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야기를 했는데 직원은 이내 약간 귀찮다는 말투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아... 네. 저희는 그냥 유심만 드리고 개통은 고객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전까지 앱으로 몇 시간씩 해도 안되던데, 삽질을 괜히 한 건가?'
지켜보던 남편이 말했다.
"여기서는 요금제 가입이 어려울까요? 저는 현장에서 했었는데."
"네에, 지금은 그렇게 안 해드려요."
직원은 바삐 창고 같은데 들어가 유심칩을 꺼내오고선 나에게 들려주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나름 험난했는데 너무 순식간에 업무가 끝나버렸다. 얼른 개통 업무를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문 밖으로 나와 주차장 벤치에 앉았다. 직원이 준 유심칩을 살펴보니 요금제 개통하는 방법이 나와있었다. 먼저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란다.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란다. 몇 분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다른 직원이 받고선 나에게 담당 상담원이 모두 통화 중이니 조금 이따가 내 번호로 다시 전화를 준다고 했다.
'할 수 없지.'
나는 다음 여행지로 이동했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요금제 때문에 전화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네, 제가 유심칩은 영업점에서 받았고요. 개통을 하려고요."
"네네, 실례지만 혹시 저희 회사 기존 고객이실까요?”
"아, 아니요."
"아... 네 고객님, 그러시면 번거로우시더라도 영업점에 방문을 하시거나 앱으로 먼저 회원 가입 절차를 진행하셔야 되셔요."
"오늘 영업점에서는 그런 말씀이 없으셨는데, 그냥 제가 직접 하라고만 했어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 요금제에 가입하시려면 꼭 저희 기존 고객이셔야 해요."
나는 너무 허탈했다. 앱에서 자꾸 오류가 나서 못했고, 영업점에서도 제대로 안내를 받지 못했는데 또 거길 가야 하다니. 아까 내게 제대로 가입되어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귀찮은 듯 업무처리를 했던 직원이 너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휴가 기간에 이런 불편한 일을 당한 게 너무 화가 났다. 머리가 엉킨 듯한 느낌이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이 회사 홈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고 고객 불만을 접수하는 페이지에 들어갔다. 내 이름과 전화번호,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내 불만을 구구절절 적었다.
'어느 지점의 어떤 직원에게 불만이 있다. 요금제를 바꾸러 갔는데 기존 고객이 맞는지 묻지도 않은 채 매뉴얼대로 귀찮은 듯하게 응대를 했다. 앱으로도 안 돼서 직접 현장에 간 건데 그 직원 때문에 다시 방문을 해야 한다.'
뭐 대충 이런 내용으로 씩씩거리며 작성을 했다. 그리고 엔터 버튼을 꾹 눌렀다.
다음날이었다. 저녁 시간 즈음 내 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그 직원이었다.
자신은 무슨무슨 지점의 누구누구다. 하면서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했다.
시원하게 고발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응징했다고 생각했는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해 사과하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너무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러면 안됐는데 과하게 처신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몇 년 전 내가 생각났다.
몇 년 전 나는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살던 집이 재계약이 되는 시점이었는데 새로 이사 갈 집 보증금을 내야 해서 집주인에게 전셋값을 올리는 대신 월세를 내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런데 집주인이 제시한 월세값이 당시 시세보다 너무 비쌌다. 남편은 얼마 안 되는 돈이라고 생각했는지 오케이를 했는데,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니 2배 정도 비싸게 주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어 내가 다시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하기로 했다.
그 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나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집주인과 통화를 했다. 집주인은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인데 뭘 그러냐며 월세 일부를 약간 깎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자고 했다. 네 고맙습니다 하면서 통화를 마치는데 내 손도 벌벌 떨렸다. 그러고 나서 알았다.
'내가 을이구나.'
벌벌 떠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 날의 내가 생각이 났다.
'내가 갑질을 했구나. 만약 내 고객이라는 사람이 내가 잘못 응대한 걸 가지고 본사에 전화를 해 고발했다면, 그래서 내가 그 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사과를 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아마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그 사람을 원망하고 나 자신이 비참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이고, 직장에서 나름 높은 직급으로 존경도 받았을 아마도 내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에게 이런 일을 한 게 최선이었던 걸까?'
아직도 답은 모르겠다. 이런 불편한 일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맞는 것인지. 그렇지만 그 날은 조금만 더 참을 걸, 화났을 때 바로 행동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내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 떨리는 목소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