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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06. 2021

이서진의 '타력'

이서진을 좋아한다. 이서진은 배우다. 물론 출중한 연기력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송강호나 설경구 같은 이미지가 그에겐 없다. 그렇다고 그의 연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적당하다. ‘한방’도 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드라마 <다모>) 하나면 충분하다. 자고로 ‘인생은 한 방’이다. <불새> <이산>의 연이은 성공은 그가 녹록하지 않은 배우임을 보여준다. 


이서진은 예능인이다. 물론 빼어난 예능감을 선보이지는 않는다. 개그계에서 잔뼈가 굵은 예능인의 이미지가 그에겐 없다. 그렇다고 그의 예능감이 어색한 것도 아니다. 적절하다. 나영석 PD의 페르소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는 분명 채널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다. <삼시세끼 어촌편 5>의 차승원과 유해진의 멘트가 증명한다. “밉지가 않아.”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데도 밉지 않은 건 능력이다.   


이서진은 스타일리시하다. 그의 얼굴은 현빈이나 원빈 류가 아니다. 한국 나이로 오십을 넘겼다. 그렇다고 그의 외모가 빠지는 건 아니다. 충분하다. 그는 ‘태(態)’가 좋다. 178센티미터의 신장도 준수하다. 부럽다. <꽃보다 할배 리턴즈>에서 그가 멘 프라다 백팩과 <금요일 금요일 밤에 이서진의 뉴욕뉴욕>에서 그가 입은 프라다 LR-HX003-MK2 GORE-TEX PRO nylon fabric jacket은 그의 패션 감각의 정수다. 


이서진의 스타일은 DNA다. <꽃보다 할배>에서 그는 ‘미대 형’이었다. <삼시세끼 어촌편 5>에서 차승원과 유해진은 그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알다시피 집안이 출중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제일은행장과 서울은행장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안흥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의 작은 어머니는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의 3녀다. “중학교 때 미국 왔을 때 잔 호텔이 여기야!”(<이서진의 뉴욕뉴욕>)라고 말할 수 있는 1971년생 한국 남자는 흔치 않다. 뉴욕대학교 경영학과라는 이력은 어떠한가. 유학파! <윤식당>의 사장 윤여정을 모시는 상무 역할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서진의 배경과 조건은 장점일 뿐이다. 그의 결정적인 매력은 ‘대충대충’에 있다. 그에게선 치밀하고 격정적인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말한다. 순풍이 불면 앞으로 나아가고 역풍이 불면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할 일은 한다. 그래서 편안하다. ‘타력(他力)’의 도가 느껴진다. 


타력은 ‘타력본원(他力本願)’을 말한다. 남이 하는 대로 내맡김이라는 의미다. 반대말은 ‘자력(自力)’, 자기 혼자 힘으로 사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자력이 타력보다 책임감 있게 들린다. 세상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덕목이다. 그러나 타력본원은 무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고 생활하는 인간이 의지해야 하는 힘이다. 


타력은 불교 용어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불교 서방 정토에 있는 부처)의 본원의 힘, 또는 그것을 자기의 성불(成佛)의 힘으로 삼는 일이다. 성불이란 죽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타력은 ‘에너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원리다. 모든 배후에는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타력의 목소리(이츠키 히로유키)를 경청해야 한다. 


인간은 살아가고 생활하는 존재다. 살아가고 생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먹고사는 문제다. 그래서 모두가 노력한다. 인생을 건다. 그러나 타력의 원리에서 인생은 거는 게 아니다. 인생은 귀의하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다. 스스로 결심하고 노력해서 이룬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타력에 의지한다. 지혜로운 자는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원칙으로 살아가고 생활한다. 내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내 힘으로 배우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나영석 PD가 ‘예능’을 하자고 한다. <꽃보다 할배>에 출연했던 2013년은 예능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다. tvN도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다. 이서진은 망설이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흐름에 내맡겼(을 것이)다. 자력에서 타력으로.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다. 


잘한 일이다. PD의 섭외는 배우나 예능인의 소관이 아니다. 내가 하겠다고 해서 출연하는 게 아니다. 나는 웃기지도 않은데, 나는 배우인데, 심지어 네 명의 노배우를 에스코트해서 여행을 다녀오는 프로그램이라니…… 나 혼자 부정하고 초조해 하면 될 일도 안 된다. 맡겨야 한다. 우주는, 자연은, 세상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다. 자연의 순리다. ‘저절로[自]’ ‘그렇게 되는’[然] 것이다.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 


이서진이 타력의 원리를 깨우쳤는지 나는 모른다. 상관없다.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 그가 시종일관 결의하고 판단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세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타력은 ‘바람’과 같다. 타력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왔을 때 나룻배의 돛을 내리고 앉아서 졸고 있다면 타이밍을 놓친다. 우리가 할 일은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리고 하늘을 살피는 것이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라고 사력을 다하는 방송인들 사이에서 ‘적절하고’ ‘적당하게’ 노력하는 이서진에게서 ‘타력’의 섭리를 엿본다. 


오로지 자기 힘으로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생각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기다리면 된다.

바람이 불면 배를 띄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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