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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07. 2021

가능성과 한계



누구나 젊음을 꿈꾼다. 젊음을 꿈꾼다는 것은 꿈꾸는 주체가 젊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이는 꿈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꾸 나이를 얘기하는 사람,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가능성과 한계라는 말도 젊음과 늙음을 구별하는 리트머스다. 가능성을 선두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한계를 감지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한계가 눈에 보인다면 나이가 들어간다고 여기면 좋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가능성보다는 ‘한계’를 삶의 기준으로 삼으면 좋겠다. 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서점에 뿌려진 자기계발서가 끔찍하다. 새벽에 일어나라고 다그치고, 성공을 향해 돌진하라는 메시지에 질린다. 나는 활자와 영상을 가리지 않고 미디어가 뿜어내는 성공 메시지에 움찔한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도 모자라 각종 입시 학원을 오가는 젊은이들을 옥죄는 이 땅의 성공 공식에 분노한다. 그리고 자기계발서, 미디어, 성공 공식을 담은 잠언을 실어 나르고 재확인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주술(呪術)하는 SNS를 멀리한다. 


이제, 그렇게 살지 말자.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망상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찾아온 단어다.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믿을 ‘신(信)’이라는 단어와 연동된다. 나의 가능성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 자체가 비현실적임을 증명한다. 


나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끊임없이 노력한다. 세상은 그 노력을 칭찬한다. 누군가 노력할 때 생기는 자본의 부스러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가능성이라는 말로 시야에 넣고 몰두하는 사람은 예측 가능하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왜? 쉬우니까. 다루기 쉬우니까, 내 것을 팔기 쉬우니까. 반대로 무슨 목적을 지녔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세상이 꺼려한다. 왜? 다루기 어려우니까, 팔기 힘드니까. 


얼마 전 나는 누군가의 SNS를 ‘손절’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도 충분히 자기 비즈니스를 성심껏 운영하는 그가 가능성과 욕심을 구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능성을 타진하는 생각, 아니 욕심의 변화를 SNS에 담을 때마다 그것을 보는 나는 피곤해졌다. 돈, 경험, 실력, 환경…… 누가 보아도 가능성의 ‘한계’가 분명하건만 정작 자신만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능성에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할 줄 모른다. 내가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멀리하는 이유다. 지금 나의 생활은 부족하고 불충분한 지표가 아니라 나의 최선의 결과다. 속상해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그랬다면, 그때 그렇게 선택했다면, 그때 더 노력했다면…… 아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도 그때의 나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능성에 목을 매달아서는 안 된다. 그건 인간의 배꼽시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삼시세끼 끼니를 챙기는 이유는 때가 되면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가슴 두근거리는 만남을 위해, 중요한 접대를 위해,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답례하기 위해 먹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밥’은 살려고 먹는다. 밥은 우리가 현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 매일 매일…….


자신의 꿈을 위해 가능성의 지경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지금 얼마만큼 와 있고, 지금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도 어떤 일을 하다 보니, 그리고 여기저기 글도 쓰고 강의를 하다 보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이가 찾아오기도 하고, 자신의 가능성에 확신을 심어주길 바라는 기대를 안고 대화를 요청하는 이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냉정하리만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고 비평하고 재단한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호감을 느껴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단계에서 멀어진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능성을 믿어주면 뭐가 달라지나요?


지금 우리가 숫자와 평판으로 확인하는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한 뼘의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고유함’으로 인정받는 순간, 세상이 그것을 가능성과 성공이라는 단어로 바라본 것뿐이다. 


- 그저 시카고 불스가 한 팀으로 존중받았으면 해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보스턴 셀틱스, LA레이커스처럼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에서 마이클 조던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가능성이 낮을 테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각자의 삶이, 각자의 일이 ‘고유함’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고 주도하는‘넘사벽’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고유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가능성은 낮을 테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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